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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요산 아래 터 잡은 시인마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8B010101
지역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 진마마을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자현

[고갯길은 질마, 마을은 지네]

부안면 선운리는 개항기까지 흥덕군 이서면에 속해 있었다. 마을 앞에 포구가 있어 ‘선운포’ 또는 ‘선운’이라 불렀다. 그러던 것을 1914년의 행정구역 통폐합 때 부안면 구룡리와 신흥리 일부를 병합하여 ‘선운리’라 하고 고창군 부안면에 편입시켰다.

선운리는 자연마을인 진마, 신흥, 서당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가운데 서정주 시인이 태어나고 자란 진마마을은 ‘질마재’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질마재는 마을 뒤편 소요산[높이 445.4m] 자락에 있는 고갯길로, 서정주 시인의 대표 시인 「질마재 신화」를 통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질마’는 짐을 싣기 위해 쇠잔등에 얹는 ‘길마’의 사투리인데, 고갯길이 길마를 닮아서 그런지 우리나라에는 ‘질마재’라는 이름이 붙은 고개가 많다.

진마마을 뒷산은 원래 ‘쇠산’이라고 했으나 뒤에 표기하면서 ‘소요산’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동학농민혁명을 이끈 전봉준 장군의 아버지가 소요산 암자에서 글공부를 할 때, 소요산 만장봉이 목구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장군을 잉태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마을 사람들에 따르면 진마마을은 지네 형국이라고 한다. 마을 가운데로 흐르는 하천이 지네의 몸통이고, 마을 뒤편에 병풍처럼 드리워진 소요산이 머리며, 하천 양옆으로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집들이 다리라고 한다. 옛날에는 하천의 모양이 지네가 기어가듯 구불구불했으나 새마을 사업이 한창이던 1970년대 하천을 정비하면서 현재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갯벌에서는 꽃게가 한 짐]

2009년 현재 진마마을에는 42가구에 73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마을 앞에 선운포가 있었던 시절이 가장 번성했고, 마을 사람들도 가장 많이 살았다고 한다. 마을 토박이인 서용석 씨[1939년생]도 “당시에는 200호가 넘을 정도로 번성했으며, 선운포 앞으로 갯벌이 넓게 펼쳐져 있었고 포구에는 어선들이 줄지어 있었다.”고 전했다. 그리고 “갯벌에 들어가면 꽃게를 한 짐씩 짊어지고 나올 만큼 많이 잡혔다.”고도 회고했다.

그러나 당시 마을 사람들 가운데 어선을 운영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는데, 굳이 어선을 운영하지 않아도 갯벌에서 잡는 어류와 패류만으로도 수입이 제법 두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운포 앞바다를 간척하면서 생산 활동이 어업에서 농업으로 바뀌게 되었다.

지금은 전승이 중단되었지만 옛날에는 정월 대보름이 되면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는 당산제를 지냈다. 걸립패는 마을의 액운을 물리치고 땅의 기운을 상승시키기 위해 풍물을 치면서 마을의 곳곳을 돌아다녔다. 새마을 사업과 이농 현상을 거치면서 마을의 전통 문화는 점차 사라졌지만 부녀회와 청년회, 노인회, 어촌계, 유친계 등 마을 조직이 결성되어 그 명맥을 유지해 왔다.

예전보다 살기는 좋아졌지만, 항상 아쉬움이 남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옛날이 꼭 좋았던 것만은 아닌데도 자꾸 그 시절이 아름답게 기억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젊은 사람들은 모두 도시로 떠나고 나이 든 사람들만 남아 쓸쓸하게 지키고 있는 마을. 그래도 진마마을에 사는 황점술[1943년생] 씨와 김갑성[1946년생] 씨는 희망이 있다고 말한다. 미당시문학관이 들어서고 농촌 마을 종합 개발 사업이 시작되면서 진마마을을 찾아오는 외지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지고 있기 때문이란다.

[정보제공]

  • •  김사채(여, 1925년생, 부안면 선운리 진마마을 주민)
  • •  이만철(남, 1934년생, 부안면 선운리 진마마을 주민)
  • •  서용석(남, 1939년생, 부안면 선운리 진마마을 주민)
  • •  황점술(남, 1943년생, 부안면 선운리 진마마을 주민)
  • •  김갑성(남, 1946년생, 부안면 선운리 진마마을 주민)
  • •  김수성(남, 1947년생, 부안면 선운리 진마마을 주민)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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