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8A0302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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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전라북도 고창군 신림면 가평리 가평마을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한미옥 |
[마을의 역사와 풍속을 상징하는 비석들]
신림면 가평리 가평마을에는 유독 비석이 많다. 마을 안에는 물론이고 마을 입구와 논과 논 사이에도 비석들이 즐비하다. 그 중에서도 유독 효부비와 열녀비가 많은 것을 보면 가평마을의 역사와 풍속을 짐작하게 한다. ‘나문김효부기실비(羅門金孝婦紀實碑)’도 그 많은 비석들 중 하나다. 하지만 그 속에 숨겨진 사연은 그냥 지나칠 수 없다. 남편이 아내를 위해서 세운 것이기 때문이다. 이 비석의 주인공 효부김씨의 남편이 바로 나종옥[1917년생] 씨다.
나종옥 씨의 부인 김씨는 친정이 신림면 안터로, 열여섯 살에 혼례를 치르고 열일곱 살에 시집이 있는 가평마을로 들어왔다. 1942년 혼례를 치를 당시 나종옥 씨는 스물다섯 살이었다. 부인과 함께 사는 동안 여러 명의 자녀를 두었지만, 자라면서 홍역 등으로 아이 몇을 먼저 보내고, 또 딸 둘은 결혼한 뒤에 사망해서 현재 1남 2녀만 남아 있다. 막내가 아들인데, 이 아들은 부인이 마흔두 살인 1968년에 낳았다고 한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시고 3년 지난해에 그렇게도 원하던 아들을 낳았는데, 나종옥 씨는 부인이 시어머니를 극진히 모신 덕에 늦게나마 아들을 얻게 된 것이라고 하였다.
“막내아들이 시방 마흔둘 되얐당게. 시어마니가 돌아가신 지 3년 지남서 낳았어. 양시어머니 돌아가시고 3년 남서[지나면서], 우리 아들 낳았어. 3년 쇠아서, 3년 만에 우리 아들 낳았당게. 근게 우리 어머니보고 내가 이랬당게. 빨래해서 입힘서, ‘어찌든지 당신대로 밥을 얻어 잡술란게. 그러게 헐라믄 [아들] 하나 태와 도라[점지해 달라고]’ 그랬어. 근디 [어머니가] ‘죽으믄, 죽으믄 안다냐?’ 급디다[그럽디다]. 아, 근디, [돌아가시고] 3년, 3년상 넘어가고 아들 낳았당게.”
나종옥 씨는 어려서 자식이 없었던 당숙모의 양자로 들어갔다고 한다. 하지만 당숙모의 집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여서 당숙모가 일을 해서 밥을 얻어 와 자신에게 주기도 하였단다. 하지만 본래 성정이 고약한 당숙모라 어린 시절 나종옥 씨는 설움도 많이 당했다고 한다. 이후 당숙이 죽고 홀로되신 당숙모[양어머니]가 혼자 산에 나무를 하러 갔다가 중풍으로 쓰러져 버렸는데, 그날 이후 나종옥 씨와 그의 부인이 돌아가실 때인 1965년 1월 14일까지 7년간 병수발을 했다고 한다.
[중풍으로 쓰러진 양어머니 수발이 7년이여]
당시에는 워낙에 가난한 살림살이였던지라 나종옥 씨가 결혼하기 전후로 12년 동안이나 남의 집살이를 해서 가족들을 부양하던 처지여서 중환자의 병수발까지 참으로 힘든 생활이었다고 한다.
“[어머니가] 중풍으로 돌아가셨어요. 그래 갖고는 7년이라는 것을, 똥오줌을 가려내고 말허자믄 근디. 어째서 저것을[효부비를] 세운고 허니, 그 전에는 여그 또랑물을 먹고 살았어요, 또랑물을. 집집마다 또랑물을 먹고 살았는디. 하래[하루에] 똥 빨래를 열두 번, 다섯 번, 서너 번, 그렇게 허는디. 여그서 빨므는, 그 전에 요 아래 넘들이 욕 한다고, 저~ 아래 핵교 밑이, 저그 마을 끄터리(끄트머리) 가서 빨래를 해 날랐어요. 빨래 해 갖고는 눈물 바람허고 댕기고. 누가 동네 사람 생각해서도 그 아래까지 가겄냐……. 똥오줌 그렇게 치워 내고 밥 멕여 주면서. 한 밑에 밥을 떠 먹였은게. 7년간이라는 것을. 하래 빨래 일곱 번씩을 저~ 산에 밑에까지 해 날랐지요. 시방 같으믄 못 해요. [효부비는] 내가 자발적으로 세웠어요. …… [양어머니 병수발을 한] 7년간이라는 것을. 막 7년 지내고 8년째 남서[지나면서], 정월 열나흗날 돌아가셨은게. 그래서 저거 세운 것이에요.”
지금이야 집집마다 수도가 있지만 예전에는 마을 옆을 감돌아 흐르는 도랑물을 떠다 먹었던 시절이었다. 양어머니의 병수발을 하면서부터 하루에도 대여섯 번씩 빨래를 해야 했던 부인은, 위쪽에서 빨래를 하면 아래 집에서는 물을 먹을 수 없게 되기 때문에 매번 학교 밑에까지 내려가서 빨래를 해야 했다고. 양어머니가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기에, 그의 아내가 양어머니의 손과 발이 되어 대소변까지 모두 받아 주어야 했으니 그 고생이 말로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단다.
이를 본 마을 어른들은 하나같이 부인의 효성을 칭찬했고, 향교에서도 부인에게 효부상을 주기도 했다. 비록 나종옥 씨가 아들이 없는 당숙의 양자가 되면서 모시게 된 양어머니였지만 아내는 친어머니와 마찬가지로 효를 다했고, 남편인 자신에게도 최선을 다한 열부였다고 한다. 그래서 이런 연유로 나종옥 씨는 아내를 위해 1996년 6월 5일 집 옆에 비석을 세워 놓고 효부이자 열녀였던 김씨 부인을 기리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의 기억도 희미해진다. 하지만 비석에 새겨진 김씨 부인의 효와 열은 길이길이 후세에 남겨질 것이기 때문이다.
*나종옥 씨는 조사가 진행 중이던 2009년 가을 93세를 일기로 돌아가셨습니다. 소중한 자료를 제공해 주신 고인께 감사드리며,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정보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