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8A030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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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전라북도 고창군 신림면 가평리 가평마을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한미옥 |
[당산제 제물 만지는 게 보통일이 아냐]
신림면 가평리 가평마을은 지금도 매년 정월이면 당산제를 성대하게 모신다. 당산제를 모시기 위해서는 제관과 화주[제물을 장만하여 제사를 지내는 사람] 선정부터 제물 장만에 이르기까지 깐깐하게 살펴야 하니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특히 당산제를 모실 때 제일 까다로운 것이 바로 제물 장만이다. 제물을 깨끗하게 준비해서 정성껏 대접해야 당산신이 마을을 잘 보살펴주고 해를 주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화주의 선출은 늘 긴장된다.
생기 복덕에 맞추어 뽑았어도, 그 사람이 초상이 난 곳에 갔다 왔거나, 개고기 같은 부정한 음식을 먹었다면 화주가 될 수 없다. 또한 화주로 선출되고 난 뒤에도 정월 한 달 동안은 역시 상갓집과 같은 부정한 곳에는 절대로 갈 수 없고, 음식도 가려서 먹어야 한다. 만약 그것을 어기면 화주 자신이나 마을에 화가 미친다고 한다. 이처럼 화주는 까다롭게 뽑는다. 그런데 그런 어려운 화주를 벌써 여섯 번이나 한 사람이 있으니, 바로 박헌구[1933년생] 씨다.
“[당산제를] 올해 지냈죠. 예. 지냈어요, 올해도. 여그, 내가 시방, 거짐 한 3년을 했는가요. 그 전에는 한 3년 허다가 그냥 가고 그랬지. 그 전에는 안 했어요. 그때 허고 인자, 3년 했고. 내가 화주를 한 6년 했는가비요. [최근에] 3년 동안. 서로 그것을 개려야 한게. 안 개리믄(가리면) 못 해요.”
박헌구 씨는 2007년부터 올해[2009년]까지 연속으로 3년간 화주를 맡았고, 이전에 세 번 정도 화주를 한 적이 있었으니, 모두 여섯 번이나 당산제 제물을 장만한 셈이다. 제물을 장만할 때는 과거에는 당산이 있는 들에 움막을 치고 장만을 했기에 추위에 고생도 많았지만, 지금은 마을회관에서 따뜻하게 준비를 한다. 간도 보지 않고, 행여 음식에 침이라도 튀어 부정을 탈까 봐 말도 하지 않고 장만한 제물을 당산나무 앞에 차려 놓을 때는 힘들어도 마음이 뿌듯하다고 한다.
[농사일이 평생 업이다 하고 살아]
박헌구 씨는 가평마을이 고향이다. 태어난 뒤로 강원도에서 7년간의 군 생활 기간을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타지 생활을 해 본 적이 없는 그야말로 토박이인 셈이다. 군대를 다녀온 뒤 스물여섯 살인 1959년에 가평리에서 10리 정도 떨어진 곳에 사는 스무 살의 한흥순 씨와 결혼했다. 당시에 자신을 스물다섯 살이라고 속여서 부인과 결혼했다는데, 예전에는 중매로 혼인을 했기 때문에 이렇게 속아서 결혼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고 한다.
“장가는, 나, 군에 갔다 와서. 아, 스물일곱 살이나. 그때 갔죠. [부인: 스물여섯 살에 갔제, 무슨 일곱 살에 가? 다섯이다 허고, 여섯에 갔제. 자기가 간지도 몰라. 아, 다섯 살 먹었다 허고 여섯에 갔어. 옛날이라.]”
해방 후에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고창읍에 있는 중학교를 다니다가 중퇴하고 아버지를 도와 농사일을 시작한 박헌구 씨. 이후 농사일이 자신의 평생 업이 되었다고 한다. 이제는 3남 4녀의 자녀들도 모두 출가해서 서울과 경기도 등지에서 살고 있고, 논도 팔아서 자식들에게 나눠 주고 난 뒤라, 자신은 특별히 농사를 짓지 않고 부인과 소일하며 지내고 있다고 한다.
[정보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