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8A0101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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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전라북도 고창군 신림면 가평리 가평마을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서해숙 |
[큰 인물이 난다는 방장산 아래]
높이 734m인 방장산(方丈山)은 고창군의 진산으로 정읍 고부의 두승산, 부안의 변산과 더불어 전라북도의 삼신산이라고도 하며, 지리산ㆍ무등산과 더불어 호남의 삼신산이라고 불린다. 방장산은 고창군 신림면, 정읍시 입암면, 전라남도 장성군 북이면 경계에 위치해 있으며, 방향이 동쪽을 향해 있다.
방장산은 내장산의 서쪽 줄기를 따라 뻗은 능선 가운데 가장 높이 솟은 봉우리로, 양고살재에서 벽오봉, 고창고개, 봉수대, 써래봉을 거쳐 갈재로 이어져 있다. 백제 때부터 ‘방등산’ 또는 ‘반등산’이라 불리다가 조선 후기인 인조 때 청나라에 멸망한 명나라의 선비들이 중국의 삼신산인 방장산과 비슷하다 하여 ‘방장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삼국유사(三國遺事)』와 『고려사(高麗史)』 ‘악지(樂志)’ 편에는 방등산(方等山)이라 기록되어 있는데, 방등이란 불가의 용어로 ‘방정하고 평등’하다는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백제 가요인 「방등산가(方等山歌)」는 바로 이 산을 무대로 해서 지어진 노래이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반등산가」ㆍ「반등산곡」이라 기록되어 있다. 「방등산가」는 신라 말 도적이 반등산에 근거를 두고 양가집 자녀들을 많이 잡아 갔는데, 그 중 장일현(長日縣)에 사는 여자가 남편이 구하러 오지 않은 것을 원망하며 부른 노래라고 한다. 이 노랫말은 아쉽게도 현재는 전하지 않고 있다.
당초 이 산을 방등산이라고 불렀다가 방장산으로 고쳐 부르게 된 것은 산이 넓고 커서 백성을 감싸 준다는 뜻이 담겨 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전한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명나라 이여송이 방장산의 수려한 산세를 보고 큰 인물이 날 것을 경계하여 쇠말뚝 5개를 박아 산의 정기를 차단했다고 하며, 일제강점기에도 일제가 쇠말뚝을 박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고봉재가 태풍을 막아 주고]
방장산 정상에서는 호남정맥의 줄기를 한눈에 조망해 볼 수 있다. 정읍, 고창, 장성의 군계는 물론 전라남도와 전라북도의 도계를 따라 변산반도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지금은 헬기장으로 이용되고 있는 봉수대는 과거 이곳이 호남 지방의 위급한 상황을 알리는 긴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리고 억새봉이라 불리는 벽오동은 패러글라이딩 활강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방장산 주변에는 내장산 국립공원을 비롯해 선운산 도립공원, 석정온천, 고창읍성, 장성 입암산성, 백양사 등 명소가 많아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이러한 방장산의 일부이며, 신림면 가평리 가평마을 동쪽에 위치한 고봉재는 높이가 600m의 고지로서 6ㆍ25전쟁 때는 국군이 주둔했었다고 전한다. 이 고봉재가 가평마을을 감싸 안은 듯 자리하고 있어서 동북쪽에서 불어오는 강한 바람을 막아 주고 따뜻한 햇볕은 고스란히 받고 있다. 그래서 여느 마을에 비해 비교적 기후 조건이 좋은 편이다.
마을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 마을에는 돌풍은 많으나 태풍이 분 적은 없다.”고 말한다. 다른 마을에서는 태풍이 불어 농사를 망치는 일이 빈번했으나 이곳 가평마을에서는 지금까지 태풍으로 인해 농사를 망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이는 높고 넓은 방장산이 바람막이가 되어 태풍을 막아 주기 때문에 그러한 듯싶다.
이렇듯 유리한 기후 조건과 함께 가평마을은 농토가 많아 미질이 좋은 쌀을 많이 수확하고 있다. 특히 여느 마을과 비교할 때 쌀 수확량이 많아 마을 사람들은 비교적 풍족한 생활을 누리고 있는 편이다. 그래서 예전에 근동에 사는 사람들이 고용살이를 하러 보따리를 들고 이 마을로 많이들 왔다고 한다.
논 열두 마지기[약 7,934m²] 정도면 일꾼 없이 농사를 짓기가 힘든데, 가평마을은 여느 마을에 비해 논농사를 많이 짓는 편이라 일꾼들이 많았단다. 그래서 유월 유두날이 되면 일꾼들을 위해 한바탕 잔치를 마련해 주고, 백중날이면 일꾼뿐만 아니라 마을 사람들 모두가 함께 어울려 놀면서 휴식을 취했다. 이렇게 마을에 일꾼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경작할 땅이 많다는 것이고, 땅이 많다는 것은 또한 그만큼 풍요롭고 풍성한 마을이었음을 의미한다.
[박사를 많이 배출한 마을]
이렇듯 풍족한 생활이 바탕이 되고 방장산의 꿋꿋한 정기를 이어받은 가평마을에서는 걸출한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었는데, 이들 가운데는 유독 박사가 많다고 한다. 지금은 대부분 마을의 출향 인사지만, 사회적으로 유명한 이들이 고향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마을에 행사가 있으면 늘 앞을 다투어 참여하고 있다. 또한 박사 외에도 판사, 검사, 변호사, 서기관, 경찰, 교장, 교감 등 사회적으로 내로라하는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이렇게 훌륭한 인물들이 배출되는 것에 대해 마을 사람들은 마을이 방장산의 정기를 올곧게 받기 때문에, 그리고 풍수적으로 터가 좋은 곳이기 때문에 그러하다고 모두들 입을 모은다. 그만큼 마을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자부심과 애정이 대단하다.
2009년 현재 가평마을에는 62가구가 살고 있다. 여느 마을에 비하면 제법 큰 마을인데, 고씨 성을 가진 이가 대략 35가구로 전체의 70%를 차지하며, 기씨가 7가구, 유씨가 9가구, 문씨가 3가구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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