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8310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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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在華 參奉 義兵戰鬪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전라북도 고창군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백원철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908년 2월 - 김재화 참봉 의병 활동 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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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결 시기/일시 | 1908년 9월 26일 - 김재화 참봉 의병 변산 청련암에서 일본군과 전투 중 김재화 의병장 사망 |
성격 | 의병 전투 |
관련 인물/단체 | 김재화 |
[정의]
개항기 전라북도 고창 출신의 의병장 김재화가 이끌었던 의병 전투.
[개설]
김재화 참봉 의병전투 를 아끈 김재화(金在華)[1878~1908]의 본관은 안동(安東)으로, 전라북도 고창군 상하면 비봉정에서 태어났다. 김재화 참봉 의병 부대는 1908년(순종 2) 2월부터 같은 해 9월 26일까지 고창군과 부안군 일대에서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김재화 참봉 의병 부대에는 150명~200여 명의 의병이 활동하였다고 전한다.
[역사적 배경]
1907년 7월 헤이그(Hague) 밀사 사건으로 고종이 강제 퇴위를 당하고 8월에는 일제에 의해 군대까지 강제 해산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김재화는 31세 때인 1908년 2월부터 고창군과 부안군 일대에서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는데, 이러한 국내의 정치 상황에 의분을 느끼고 의병 활동을 전개한 것으로 보인다. 김재화 참봉 의병 부대는 한 번에 수십 명 내지 100여 명의 부대원이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하고, 조선인으로서 민간의 약탈을 일삼는 자 또한 체포하여 참수하였다.
김재화 참봉 의병 부대의 중군은 김봉서, 초군은 이경엽, 전부는 박래홍, 후부는 나윤구, 좌익은 서응호, 우익은 홍문신, 서기는 유장렬이며, 초기의 6초는 설도학·김판동·이기춘·정성관·정순명 등이었다. 김재화 참봉 의병부대의 의병들은 “동방에서 태어나서 함께 죽을 뿐이다. 죽어서 어찌 명예가 없겠느냐. 진실로 왜적에게 굽히지 않는다면 하루를 살아도 영광이리라.” 하고 맹세하였다고 한다. 당시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의 죽도에 거처하던 전 사헌부장령 간재(艮齋) 전우(田愚)가 군자금 4만 전을 내어 이들을 도왔다.
[경과]
김재화 참봉 의병 부대의 주요 활동 무대는 고창군의 무장면·심원면·해리면·부안면과 부안군의 변산·줄포 등 해안 지역이었다. 1908년 2월부터 9월까지 약 7개월간 일본군과 10여 회 이상 접전을 벌여 일본군 10여 명을 참살하였으며, 폭도 및 첩자 10여 명도 참수하였다고 전한다. 그해 9월 26일 변산 청련암에서 일본군 기병대 수십 명과 접전을 벌이던 김재화 의병장은, 부대원을 해산하여 돌려보내고 초장 이복선과 함께 끝까지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결과]
김재화 의병장이 전사한 후 의병 부대가 해산됨으로써 고창 지역 의병 투쟁은 사실상 종료되었다. 이후 정읍, 고창, 부안 지역에서 일본군의 활동은 거침이 없었고, 그만큼 조선인의 생존권은 위태롭게 되었다.
[의의와 평가]
김재화 참봉 의병 부대는 고창 지역에서 독자적으로 활동한 의병 조직이었다. 상시적으로 운영하기보다는 평시에는 해체하였다가 수시로 모여 활동하였으므로 그 실체를 파악하기 어려웠을 뿐 아니라 부대원이 150명~200여 명이어서 일본군에게는 상당히 위협적인 존재였다고 한다. 김재화 참봉 의병 부대는 일본군의 침략 행위에 맞서 국권을 지키려는 목표 외에, 친일 조선인과 의병을 가장한 조선인 폭도들을 징치하여 조선인 백성의 생존을 보호하는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