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801833
한자 尹淮
영어음역 Yun hoe
이칭/별칭 청경(淸卿),청향당(淸香堂),문도(文度)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전라북도 고창군
시대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권순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출신지 전라북도 고창군
성별
생년 1380년연표보기
몰년 1436년연표보기
본관 무송
대표관직 대제학

[정의]

고려 말에서 조선 초 고창 출신의 문신.

[개설]

윤회(尹淮)는 조선 초의 대표적인 문한관(文翰官)으로서 국가의 여러 편찬 사업에 참여하고 많은 글을 지었으며, 경연에서 여러 차례 경사(經史)를 강론하였다.

[가계]

본관은 무송(茂松). 자는 청경(淸卿), 호는 청향당(淸香堂). 증조할아버지는 고려 말 첨의찬성사를 지낸 문정공(文貞公) 율정(栗亭) 윤택(尹澤)이며, 할아버지는 『고려사(高麗史)』 효우전에 입전된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 윤구생(尹龜生)이고, 아버지는 공민왕 때 장원 급제하고 조선 건국에 참여하여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등을 지낸 윤소종(尹紹宗)이다. 아들은 윤경연(尹景淵)과 윤경원(尹景源)이다.

[활동사항]

윤회는 나이 10세에 『통감강목(通鑑綱目)』을 외울 정도로 총명하고 민첩하였다. 1401년(태종 1)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좌정언, 이조좌랑·병조좌랑, 이조정랑·예조정랑과 지승문원사(知承文院事)를 거쳐 변정도감(辨正都監)이 되어 송사를 판결함이 공명하고 진실하였다. 1417년(태종 17)에는 승정원의 대언(代言)이 되었다. 태종이 일찍이 윤회에게 이르기를 “경은 학문이 고금을 통달했으므로 세상에 드문 재주이고, 용렬한 무리와 비교할 바가 아니니 힘쓰라” 하였다. 왕은 곧 윤회를 병조참의로 삼아 가까이 두고 늘 ‘순정(純正)한 학자’라 일컬었다.

집현전이 설치되자 1422년(세종 4) 부제학으로 임명되고 다시 예문제학(藝文提學), 대제학(大提學)이 되었다. 술을 즐겨, 태종세종이 “너는 총명하고 똑똑한 사람인데, 술 마시기를 도에 넘치게 하는 것이 너의 결점이다. 이제부터 양전(兩殿)에서 하사하는 술 이외에는 과음하지 말라”며 여러 차례 타일렀으나 그치지 못하였다. 윤회는 풍질(風疾)을 앓았는데 병을 참고 조정에서 일을 계속 보아 위중해졌다. 임금이 의원을 보내어 진찰하게 하고, 또 내수소(內需所)의 좋은 약을 내려 주어 조섭(調攝)하게 하였으나 세상을 떠나니 이때 나이 57세였다.

[저술 및 작품]

1424년(세종 6) 태종의 막내딸 정선공주(貞善公主)의 묘지명을 지었으며, 아버지 윤소종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편찬한 『고려사』를 다시 개정하여 완성하였다. 1432년(세종 14)에는 『팔도지리지(八道地理志)』를 편찬하였다. 1434년(세종 16)에는 삼강 행실의 교서를 지었으며, 『자치통감(資治通鑑)』을 고열(考閱) 해설 참교(參校)하여 이듬해 『통감훈의(通鑑訓義)』를 편찬하였다. 저서로 『청경집(淸卿集)』이 있다.

[상훈과 추모]

윤회가 세상을 떠나자 조정에서는 조회와 저자[市場]를 정지한 후, 조문(弔問)하고 부의를 내렸으며, 세자 또한 조의를 표하였다. 문도(文度)란 시호를 내리니, 학문에 부지런하고 묻기를 좋아함을 문(文)이라 하고, 마음을 능히 의리로써 제어함을 도(度)라 하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