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8018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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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庾應圭 |
영어음역 | Yu eunggyu |
이칭/별칭 | 유원규(庾元規),빈옥(賓玉)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라북도 고창군 |
시대 | 고려/고려 전기 |
집필자 | 권순형 |
[정의]
고려 시대 고창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무송(茂松). 자는 빈옥(賓玉), 초명은 유원규(庾元規). 아버지는 의종(毅宗) 묘정에 배향된 공숙공(恭肅公) 유필(庾弼)로, 유응규(庾應圭)는 5남 중 맏아들이다. 유필은 문장과 덕행이 출중했으며 성품이 진실하고 정직하여 아첨하지 않았다. 의종 때에 벼슬이 판이부사(判吏部事)까지 올랐다. 왕의 수차례에 걸친 설득에도 불구하고 왕의 사랑하는 신하 정함(鄭諴)의 불합리한 관직 임명에 죽을 때까지 거부하는 강직함을 보였다.
유응규의 동생은 유자량(庾資諒)으로 행정 실무에 능해 지방관으로 가는 곳마다 업적이 있었으며, 대신의 지위에까지 올랐다. 유응규의 아들은 유희(庾禧)와 유세겸(庾世謙)으로 모두 관직 생활을 했고, 특히 유세겸의 아들 유석(庾碩)은 과거에 장원 급제하고, 청렴결백한 관리로 유명해 『고려사(高麗史)』 양리전(良吏傳)에 올랐다.
[활동사항]
유응규는 민첩하고 지혜로웠으며 풍채가 아름다워 당시 사람들이 옥(玉)같은 사람이라 하였다. 글을 잘 지었으나 과거 시험에 두 번 낙방하고, 음서로 내시(內侍)에 보임되었다가 남경유수로 나아갔다. 정사를 청렴 간소하게 하여 주민들에게 어떤 물건도 받지 않았다. 실제로 유응규의 처가 해산한 후 병이 들었는데도 나물국만 먹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아전이 몰래 꿩 한 마리를 갖다 주었다. 이에 유응규의 처가 말하길 “주인께서 평생 남의 선물을 받은 적이 없는데, 내가 어찌 나의 배를 채우고자 남편의 덕행을 더럽히겠는가?”라 하여 아전이 얼굴을 붉히고 돌아갔다고 한다.
1170년(의종 24) 무신정변이 일어나 정중부(鄭仲夫) 등이 의종을 폐위시키고 명종(明宗)을 옹립하였다. 명종은 유응규의 명성을 들었기에 그를 다시 중앙으로 불러들여 국서를 가지고 금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 금나라에서 새 왕의 즉위를 인정치 않고 전왕 양위의 경위를 문책하겠다고 하자 유응규는 차라리 죽겠다며 단식을 시작하였다.
단식 7일째 유응규가 기진해 거의 죽을 지경이 되자 황제는 회답 국서와 어찬(御饡), 비단 등을 후히 주어 돌려보냈다. 이에 고려에서는 유응규를 군기감(軍器監) 겸 태자중사인(太子中舍人)으로 승진시켰으며, 이후 고려에 오는 금나라 사신들은 모두 반드시 그의 안부를 물었다. 어느 날 궁중에 불이 나자 유응규는 먼저 경령전(景靈殿)으로 가서 그곳에 둔 왕의 선대 초상화들을 안고 나왔으며, 다시 중서성으로 가서 국인(國印)을 꺼내어 주위의 귀감이 되었다.
1173년(명종 3) 집권 무신에 불만을 품은 문신 김보당(金甫當)이 군대를 동원하여 정중부 등을 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 때, 김보당이 “모든 문신과 함께 도모하였다.”라고 무고하자 정중부 등이 문관을 수색하여 거의 다 학살하였다. 한 병사가 재상 윤인첨(尹鱗瞻)과 유응규도 죽이려 하였으나 유응규는 “무고한 사람을 죽이면 반드시 재앙을 받는 법”이라며 그들을 설득했고, 그들 역시 유응규가 금나라에 들어가 새 정권을 추인케 한 공로를 인정하여 살려주었다.
1174년(명종 4) 조위총(趙位寵)이 반란을 일으켜 여러 성(城)들이 호응하였다. 왕은 유응규가 명망 있는 사람이라 하여 그를 각 성에 파견, 선무하게 하자 여러 성들이 점차 귀순하였다. 왕은 유응규의 벼슬을 공부시랑(工部侍郞)으로 올려 주었다. 1175년(명종 5) 유응규가 급사중(給事中) 사정유(史正儒)와 함께 서경으로 가서 조위총을 만나 설득하자 이에 감복한 조위총이 즉석에서 글을 올려 귀순할 것을 청원하였다. 그러나 유응규가 떠나자 조위총은 마음을 바꿔 그를 죽이려하였으나 미치지 못해 화를 면하였다. 이 해 유응규는 5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