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8008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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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文敎 |
영어음역 | Yi Mungyo |
이칭/별칭 | 대성(大成)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전라북도 고창군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문병학 |
[정의]
개항기 고창 지역에서 활동한 동학 농민 혁명 지도자.
[개설]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자는 대성(大成)이다. 1858년 지금의 전라남도 영광군 묘량면 영당리 소골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윤록이다.
[활동사항]
이문교는 어려서 아버지를 따라 무장현 청해면 안산리[현 전라북도 고창군 해리면 안산리]로 이사했다가 다시 왕거마을로 옮겨 살았다. 이후 이문교는 외가 사람들의 권유로 동학에 입교(入敎)하였다. 1894년 동학 농민군들이 지금의 고창군 공음면 구암리 구수내 당산마을에서 무장 창의문을 발표하던 1차 기포 때, 이문교는 근 100여 명의 동학도를 이끌고 와 세력을 과시하였다.
당시 37세의 나이였던 이문교는 향반 출신으로 최선봉에서 농민군을 지휘하였고, 농민군 두령이었던 송경찬(宋敬贊)·강경중(姜敬重) 등과 함께 휘하에 1,300여 명의 농민군을 진두지휘하였다. 이어 4월 6일 고창성에 무혈 입성할 때도 앞장섰으며, 4월 9일 동학 교도들에 대한 지방 관아의 탄압이 거세지자 동학 농민군 역시 무장 관아에 대한 강력한 응징을 주장했는데, 이문교 역시 이 주장에 찬성하였다. 그러나 11월의 우금치 전투에서 패하여 숨어 지내던 중 토호인 김씨들의 밀고로 귀가한 지 20일 만에 관군에 체포되었다. 결국 이문교는 무장현에서 총살을 당했으며, 재차 화형까지 당하는 두 번의죽음을 맞이하였다. 시신은 그가 살았던 왕거마을 뒤 조지산(造知山)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