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8007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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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尹子雲 |
영어음역 | Yun Jaun |
이칭/별칭 | 망지(望之),낙한재(樂閑齋),문헌(文憲)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라북도 고창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주명준 |
[정의]
조선 전기 고창 출신의 문신.
[개설]
윤자운(尹子雲)의 집안은 고려 시대부터 이름 있는 가문이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서 사신(史臣)은, 그를 성품이 편협하고 아무런 재능이 없으면서도 의정부의 고관이 되어 별다른 정책을 건의한 것도 없으며, 이시애(李施愛)의 난 때에는 협박을 받고 적이 조정을 속이려는 문서에 서명하고 적을 대할 때마다 대인(大人)이라 칭하였다고 혹평하였다. 그러나 그가 살아 있을 때 한 번도 탄핵을 받지 않았고, 이시애의 난 때 실수를 하였으나 왕이 문책하지 않고 오히려 그를 위로하고 등용한 것을 보거나, 그가 죽자 왕명으로 조회를 중지하고 철시한 것을 보면 매우 존경받는 정치가이었음을 알 수 있다.
[가계]
본관은 무송(茂松). 자는 망지(望之), 호는 낙한재(樂閑齋). 태조 대에 회군공신(回軍功臣) 3등에 오른 윤소종(尹紹宗)의 증손자이고, 『팔도지리지(八道地理志)』를 편찬한 윤회(尹淮)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윤경연(尹景淵)이다.
[활동사항]
윤자운은 1438년(세종 20) 진사가 되고, 1444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을 시작으로 집현전부수찬·이조좌랑·사간원좌헌납·응교 등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453년(단종 1)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수양대군을 위해 활약하였고, 그 공으로 추충좌익공신(推忠佐翼功臣)이 되었다. 이후 대호군,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를 거쳐 승정원도승지에 올랐고, 신숙주(申叔舟)와 함께 야인을 정벌하고 무송군(茂松君)에 봉하여졌다. 인수부윤(仁壽府尹)을 거쳐 병조판서, 의정부좌참찬 및 우찬성에 올랐다.
1467년(세조 13) 함경도에서 이시애가 난을 일으키자 함길도체찰사로 임명받았다. 그러나 이시애가 이미 관찰사와 절도사, 제진장(諸鎭將)을 죽이고, 또 그마저 죽이려고 칼을 빼들고 둘러싸 7일이나 지키고 있어서 하는 수 없이 적(賊)이 정부를 속이는 위조문서에 서명하고 살아 돌아왔다. 그러나 세조는 그를 위로하고 1469년에는 우의정으로 승진시켰다.
그 뒤 곧 좌의정이 되었다가 1470년(성종 1) 영의정으로 승진하고, 성종이 즉위하자 좌리공신(佐理功臣)이 되어 무송부원군 겸 예조판서(茂松府院君兼禮曹判書)에 봉해졌다. 잠시 관직에서 물러났으나 1476년(성종 7) 다시 우의정이 되었다. 사람됨이 단아하고 상밀(詳密)하여 일생 동안 관부(官府)의 탄핵을 한 번도 받은 적이 없었다. 국가에 큰일이 있을 때마다 여러 번 순찰사로 나아가 일을 처리하기도 하였는데, 이것은 한명회(韓明澮)·신숙주·구치관(具致寬) 등과 함께 좌리공신으로서 권세를 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술 및 작품]
집현전부수찬으로 정인지(鄭麟趾) 등과 함께 『고려사(高麗史)』 편찬에 참여하였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양주시 백석읍 홍죽리 산27번지에 있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문헌(文憲)으로, 충신(忠信)하고 예(禮)에 의거함이 ‘문(文)’이고, 박문(博聞)하고 다능(多能)함이 ‘헌(憲)’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