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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토벌작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800496
한자 湖南討伐作戰
영어음역 Honam Tobeol Jakjeon
영어의미역 Honam Subjugation Operation
이칭/별칭 남한폭도 대토벌 작전,호남의병 대학살 사건,남한대토벌작전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전라북도 고창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신순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의병 토벌 작전
발생(시작)연도/일시 1909년 2월연표보기
종결연도/일시 1909년 11월연표보기
관련인물/단체 와타나베

[정의]

1909년 일제가 고창 지역을 비롯한 호남 지역 의병을 토벌한 사건.

[역사적 배경]

1909년 일본군은 전라도를 중심으로 일본의 식민지화에 반대하는 항일 의병 투쟁을 철저하게 진압하는 작전을 전개하였다. 일제는 1909년 9월 1일부터 10월 30일까지 작전명 ‘남한폭도 대토벌 작전[호남 의병 대학살 사건]’ 이름으로 전라도와 그 외곽 지대에서 항일 의병 초토화 작전을 벌였다. 당시 순사대·수기대·임시파견대 등 1개 사단 병력으로 구성된 일본 군경을 와타나베 소장이 지휘하였다. 작전 지역은 섬진강에서 전라북도 부안으로 3단계에 걸친 작전이었다.

1단계는 남원·고흥·광주·영광, 2단계는 고흥·광주·영광·남서 해안, 3단계는 도서 지방으로 탈출한 의병을 사살하기 위해 무인도 지역까지 확대되었다. 이 과정에서 의병·양민 500명이 학살되었고, 민가가 방화 약탈당하는 비극이 일어났다. 또 2,500명의 의병이 체포되었으며, 자수한 뒤 의병은 해남~광양~하동을 잇는 도로 건설 강제 노역에 투입되었다.

[목적]

호남토벌작전은 전라도와 그 외곽 지대에서 활동하는 항일 의병을 초토화하기 위하여 수행되었다.

[발단]

호남 의진은 1908년 기삼연·김용구 의병장이 전사한 후 고창 출신의 의병장 박도경이 부대를 이끌었다. 4월 호남창의회맹소의 선봉장이던 김태원·조경환 등 의병장이 전사하였고, 이석용 또한 일본 군대에 쫓기면서 은신하였다. 이렇듯 1908년 8월 이후 호남 의병의 선구적 구실을 담당하던 많은 의병장이 희생되었는데도 심남일·강무경·안주홍·임창모 등 새로운 의병장이 등장하였고 조경환의 전사에 따라 그 부대의 의병장이 된 전해산은 나주와 영산포를 중심으로 심남일 부대와 손을 잡고 눈부신 활약을 하였다.

또한 전라북도의 의병 활동은 점차 충청남도 지방까지 파급되는 등 1908년 이후에는 호남 지방이 전국에서 가장 강력한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는데, 1909년 후반기부터 실시된 일본군의 전라도 지역에 대한 ‘남한폭도 대토벌 작전’의 전개는 이 지역의 의병 활동이 어떠했는가를 잘 대변해 준다.

[경과]

일본 부대는 제1경비대대[토벌 지구의 포위선을 형성하고 소요의 지점을 수비하는 일]와 제2행동부[포위선 내에서 행동하고 토벌 수색 검거 등에 종사하는 일]의 조직을 갖추고 본격적인 조사와 토벌 작전에 들어갔다. 당국으로부터 내려온 명부에 의해 거주하는 20~60세의 남자를 조사하고 그 가옥을 임검하였고 일정에 따라 지역을 정해 토벌을 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사용 병력은 제1보병 연대와 제2보병 연대에 걸쳐 총 2,260명의 병력이 투입되었다.

이 같은 조직적이고 치밀한 계획에 따라 1909년 9월 1일부터 2,260명의 병력을 호남 지방에 투입하는 동시에 현지의 경찰력을 총동원하고 서남해안에는 해군 수뇌정대(水雷艇隊)까지 동원하였다. 당시 일본군은 해안선에서 육지에서 쫓겨 오는 의병들을 잡기 위해 수뇌정대를 출동시켜 해안을 봉쇄하고 있었는데, 당시의 실정을 황현의 『매천야록』에서는 “사위(四圍)를 그물 치듯이 해 놓고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집집마다 빗으로 빗듯이 뒤져 조금이라도 혐의가 있으면 즉시 죽였다. 이에 길에는 행인이 스스로 끊어지고 이웃과도 통하지 않았다. 의병들은 삼삼오오 사방으로 달아났으나 숨을 곳이 없어 강자는 앞으로 돌진하다가 싸워 죽고, 약자는 기어 달아나다가 칼을 맞았다. 점차 쫓기어 강진·해남에 이르러 달아날 곳이 없어 죽은 사람이 수천 명에 이르렀다”라고 적고 있다.

일제는 토벌 기간을 10월 25일까지 연장하면서 잔인하고 무자비한 무력 작전을 감행하였다. 이리하여 고창 지역을 비롯한 호남에서 서종채·오장환 등 103명의 의병장이 피살 또는 체포되었고 2,000여 명에 달하는 의병이 체포되었다. 일제는 이들 의병들을 강도 살인죄로 몰아 처형하였고 또 머리를 깎아 도로 공사에 강제 동원하였다.

[결과]

호남대토벌작전은 사실상 조선 의병을 말살시키는 작전으로 그 가운데 호남 의병 활동은 잠시 주춤한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당시 일본군·일본 경찰 등에 체포되어 일본 법정에서 형을 받은 고창 출신의 의병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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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의와 평가]

호남대토벌작전은 조선의 독립을 위해 투쟁한 의병들을 말살시키기 위한 작전으로 호남 의병의 세력이 잠시 주춤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일제의 잔학한 토벌이 진행되었는데도 그들의 희생정신과 불굴의 의지는 계속되었다.

[참고문헌]
이용자 의견
관** 디지털고창문화대전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많은 이용 부탁드리며, 인용 시에는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12.11.20
k***** 안타깝고....마음이 답답하네요..좋은 정보 감사. 2012.11.16
k***** 안타깝고...마음이...답답하네요..... 2012.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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