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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800532
한자 高敞上金里支石墓群
영어음역 Sanggeum-ri Goindolgun
영어의미역 Dolmens in Sanggeum-ri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고분
지역 전라북도 고창군 대산면 상금리 상금마을 일원
시대 선사/청동기
집필자 김선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문화재 지정 일시 2021년 9월 10일연표보기 - 고창 상금리 지석묘군 전라북도 기념물 제149호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21년 11월 19일 - 고창 상금리 지석묘군 전라북도 기념물 재지정
성격 고분|고인돌
양식 탁자식|기반식|뚜껑식|지상석곽식|위석식
건립시기/연도 청동기시대
규모 205기
소재지 주소 전라북도 고창군 대산면 상금리 상금마을일원 지도보기
소유자 고창군
문화재 지정번호 전라북도 기념물

[정의]

전라북도 고창군 대산면 상금리 상금마을 일원에 있는 청동기 시대 돌무덤군.

[개설]

고창 상금리 지석묘군상금마을에서 전라남도 장성군 삼계면으로 이어지는 노령산맥 가리재[225m] 정상부까지 약 2.7㎞ 거리[고인돌로 판단되는 205기의 석재가 존재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안에 있으며, 아홉 개의 군집으로 이루어져 있다. 가리재는 법성포와 내륙 산간인 장성을 이어주는 교통로인데, 이 길을 따라 주위에 고인돌이 배치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일부 군집에서는 길을 따라 일렬로 배치된 고인돌도 확인된다. 2021년 9월 10일 전라북도 기념물 제149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전라북도 기념물로 재지정되었다.

[위치]

대산면 상금리 상금마을 일원으로, 남쪽은 전라남도 영광군, 동쪽은 전라남도 장성군과 접하고 있다.

[형태]

고인돌의 덮개돌은 장축 길이 200~400㎝ 범위가 주류를 이루는데, 600㎝가 넘는 것도 있다. 두께는 100㎝ 이하가 대부분이나 300㎝가 넘는 대형의 덮개돌도 확인된다. 덮개돌의 단면 형태는 장방형이 주류를 이루나 방형, 판석형, 제형 등 다양한 모습을 보인다.

지표 조사였기 때문에 정확한 고인돌의 형태는 알 수 없으나 탁자식으로 추정되는 것을 포함하여 뚜껑식, 기반식, 여러 매의 받침돌로 덮개돌 아래를 돌린 위석식, 여러 매의 판석을 덮개돌 아래에 둘러 무덤방을 지상에 마련한 지상 석곽식 및 지상 석곽식과 보조 받침돌이 결합된 형태 등 다양하다.

받침돌의 형태는 괴석형과 주형 받침돌이 같이 나타나고 있다. 받침돌은 기본적으로 사방에 네 개를 고였으며, 한쪽에 하나를 더 추가하거나 중앙에 하나를 더 고여 5받침돌 식으로 받친 예도 있다.

[현황]

원래의 자리를 지킨 것도 있지만, 상금마을의 주택 건설이나 경지 정리, 경작 등에 의해 덮개돌이 원래의 자리를 이탈한 것, 하부 구조가 심하게 매몰되어 고인돌인지 여부를 판단하기 어려운 것들도 포함되어 있다. 좀 더 정밀한 조사를 실시하여 원래의 자리나 고인돌 존재 여부를 밝힐 필요가 있다.

[의의와 평가]

마을 입구부터 가리재 정상까지 고인돌이 있어 당시 해안과 내륙을 이어주는 교통 루트나 교역 루트를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고창 상금리 지석묘군에는 다양한 형태의 고인돌이 군집해 있다.

[참고문헌]
이용자 의견
이** 上金里-群 → 上金里支石墓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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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변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을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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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으로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2020.07.06
유** 어떻든 신기한 것은 수천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도 정확한 평형을 이루고 있다는 것은
그 당시 기술이 보통이 아니었고, 설치 과정상에 과학적으로 땅을 고르고 고임돌을
상판에 맞추어 정확하게 배치하고 균형을 잡았다는 것은 최고의 과학이 들어갔다고
봐야 겠습니다. 고인돌 위에 여러명이 올라가도 끄덕하지 않는 다는 것은 고임돌과
상판의 틈새가 전혀 빈틈이 없는 정교
  • 답변
  • 디지털고창문화대전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정보 감사드리며, 앞으로도 많은 이용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014.09.01
유** 즉 인구의 증가 및 부족국가의 힘이 세질수록 사람의 힘이 가해져서 제작,이동 및
좋은위치에 배치 등 여러 작위적인 행동이 가해졌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상금 마을
회관 앞이나 시암 건너편 고인돌은 옮겨지지 않은 것 같고, 막집이나 농밭골의 고인돌
은 정교한 제작과정을 거쳐 옮겨졌을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2014.09.01
유** 옮기는 과정에서 아마도 수백명이 달라 붙어 길을 내고 길바닥에 큰 통나무를 깔고
동아줄을 이용해서 잡아당기고 밀고 하여 옮겼을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현재
형태가 자연스러운 고인돌은 옮겼을 가능성이 떨어지고, 사각에 가까운 변형된 고인돌
은 옮겨져 좋은 위치에 배치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2014.09.01
유** 또한 60년대 까지는 주민들 사이에 돌을 손대는 것은 큰 벌을 받는 다고 생각했었고
심지어 새마을 운동 때 집 안마당에 있는 너럭 바위를 쪼갠 집은 여러 사람이 단명
하여 제대로 살지 못했다는 소문이 자자했으니 대대로 고인돌은 손을 못대게 금단의
장소로 지켜온 것으로 보입니다.
2014.09.01
유** 현재 자기 형태를 유지하는 고인돌은 모두 제 자리를 지키는 것들이고,쪼개져서
나뒹구는 것들은 박정희 시절 새마을 운동시 길을 넓히는 과정에서 생긴 것들입니다.
농사짓는 사람들이 고인돌을 옮길 수 있는 힘이나 능력이 없었고 또한 옮길 이유도
없었던 것입니다. 세월의 흐름에 자연적으로 이동했을 가능성은 있습니다.
2014.09.01
유** 시암박골에는 지금도 제작하다 만 고인돌이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거대한
바위를 어떻게 쪼갰을까요? 현재 남아있는 고인돌 대부분은 단면이 인위적인 힘이
가해진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겨울에 쐐기를 이용해서 절단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즉 연대는 지금으로부터 4~5천년 전의 문화유산이라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2014.09.01
유** 고인돌 한개를 제작하여 옮기는 것은 지금 돈으로 따져도 수천만원이 드는 크나큰
공사였다고 생각됩니다. 이는 부족장이나 그 가족이 아니면 그많은 인력이나 돈을
끌어모을 수 없었다고 봅니다. 상금 앞에 펼쳐진 평야를 기반으로 하는 족장의 무덤이
맞다고 봅니다. 고인돌 제작은 막집에서 위로 1km정도 떨어진 시암박골 이었을 가능성
이 다분합니다.
2014.09.01
유** 광주나 장성에서 생산된 세곡을 한양까지 옮기는 주요 길목이었으며, 장날이면 생말
등에서 대산장이나 영광장으로 다니는 주요한 길이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보기에는 현재의 고인들 부장품은 거의가 토기 종류였으며 청동기가
없었던 것으로 판단됩니다. 이는 우리나라 부족국가[고조선 시대 이전]시대에
부족장과 그 가족의 묘로 사료됩니다.
2014.09.01
유** 상금마을이 호남 내륙 지방과 바닷길(법성포)를 연결해 주는 주요한 길임은 정확하게
보신 것 같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상금마을에서 200m 정도 가랫재로 올라가다
보면 당산나무가 있고, 당산나무 밑에 막집이 있었답니다. 아마도 60년대 초반까지는
주막으로 나그네가 잠을 자거나 술을 먹을 수 있는 주막집이었을 겁니다.
2014.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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