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6012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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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淸白吏-化身-崔碩 |
영어공식명칭 | Personification of Cheongbaekri, Choi Seok |
영어음역 | Personification of Cheongbaekri, Choi Seok 0 |
영어공식명칭 | Personification of Cheongbaekri, Choi Seok |
분야 | 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전라남도 순천시 |
시대 | 고려/고려 |
집필자 | 이욱 |
[정의]
고려시대 순천 지역에서 승평부사를 역임한 청렴한 관료이자 오늘날 순천의 정신을 대표하는 순천팔마비의 주인공.
[개설]
고려시대 관료 최석(崔碩)은 퇴임하면서 관례로 받던 말 여덟 마리를 받지 않고 돌려보냈다. 최석의 행동은 관례를 깬 것이었고, 이후 퇴직 수령에게 말을 주던 관행은 폐지되었다. 순천 사람들은 그 공덕을 기리기 위해 ‘팔마비’를 세웠고, 지금까지도 최석의 청렴함은 순천의 정신으로 기림받고 있다.
[순천의 상징, 팔마]
전라남도 순천시에는 유독 ‘팔마(八馬)’라는 이름이 붙은 곳이 많다. 팔마초등학교를 비롯해 팔마중학교, 팔마고등학교가 있다. 동일한 교육재단이 세웠기 때문도 아니고, 같은 동네에 자리 잡은 것도 아니지만, 초·중·고에 모두 ‘팔마’란 이름이 붙어 있다. 또 남승룡을 기념하는 마라톤 대회의 출발점인 경기장 이름도 팔마종합경기장이다. 최근 순천 시민의 건강을 위해 국가에서 지은 수영장 역시 팔마수영장이다. 물론 팔마로라고 명명한 거리도 있으며, 음식점이나 각종 기업체에도 ‘팔마’라는 이름을 쉽게 찾을 수 있다. 하지만 ‘팔마’가 과거에 순천을 일컫던 또 다른 이름, 이른바 별칭은 아니다. 순천은 승평(昇平) 혹은 평양(平陽)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지명과 무관한 ‘팔마’라는 이름을 순천 사람들이 지금껏 기억하고, ‘순천’ 하면 팔마를 연상하게 되는 건 고려시대 충렬왕 때 승평부사(昇平府使)를 지냈던 최석이라는 관료의 청렴함 때문이었다. 여기에 담긴 사연은 무엇일까?
[최석, 말 8마리를 돌려주다]
충렬왕 때 승평부사를 지냈던 최석은 명문가 출신도 아니고, 역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위인도 아니었다. 최석은 『고려사(高麗史)』에 딱 두 번 언급되었을 뿐이다. 1277년(충렬왕 2) 지금의 제주도인 탐라에 큰 기근이 들어 굶어 죽는 자들이 속출하였다. 심지어 전 가족이 굶어 죽는 일도 있었다. 이에 고려 정부에서 최석을 파견하여 진휼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하나이다. 1281년(충렬왕 7) 승평부사 최석을 비서랑(秘書郎)에 임명했다는 기록이 두 번째다. 이외에 최석의 본관이나 선대 등 최석의 구체적인 면모를 알 수 있는 어떤 자료도 현재까지 발견된 것은 없다. 그러나 『고려사』에 딱 두 번 인용되었던 최석을 순천 사람들이 지금도 기억하고 추모하는 것은 비서랑에 임명했다는 기사 다음에 나오는 내용 때문이다. 조금 번잡하지만, 그 기록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승평부사 최석을 비서랑으로 삼았다. 승평부에서는 옛날 풍속이 읍의 수령이 갈 때마다 반드시 말을 주었는데, 부사는 8필, 부사(副使)는 7필, 법조(法曹)는 6필씩 마음대로 골라가게 하였다. 최석이 교체되어 돌아가게 되자, 고을 사람들이 관례대로 여러 필의 말을 가지고 와서 말을 고르도록 요청하였다.
이에 최석은 웃으면서 말하였다. “말이 서울까지 갈 수만 있으면 충분한데, 무엇 때문에 고른단 말인가?” 그리고는 집에 도착하자 말을 돌려보냈는데 아전은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최석은 말하였다. “내가 너의 고을에 수령으로 갔다가, 나의 암말이 낳은 새끼를 지금 데리고 왔으니, 이것은 나의 욕심이었다. 네가 받지 않는 것은 내가 말을 원하면서도 체면 때문에 겉으로만 사양하는 척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 마침내 자신의 암말이 낳았던 망아지까지 돌려주었다. 이후 승평에서는 교체되어 돌아가는 관원에게 말을 골라가게 했던 폐단이 드디어 없어졌다. 고을 사람들이 그 덕을 칭송하여 비석을 세웠는데, ‘팔마비(八馬碑)’라 이름하였다.
최석은 퇴임한 수령에게 관례로 주던 여덟 마리의 말을 받지 않고 돌려주었다. 다른 사람들은 관례라는 이유로 죄의식 없이 받았고, 이를 받지 않겠다는 최석이 오히려 이상한 사람으로 치부되는 상황이었다. 최석은 자신의 진심을 보이기 위해, 자신 소유의 말이 낳은 망아지까지 딸려 보냈다. 승평부사로 재임하는 동안에 자신 소유의 말을 먹인 먹이는 순천의 재원이고, 따라서 그 말이 낳은 새끼의 소유권도 순천에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행동으로 자신은 여덟 마리의 말에 아무런 욕심이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었고, 마침내 아전은 여덟 마리의 말을 끌고 순천으로 내려왔다.
『고려사』를 지은 이들은 최석의 이 남다른 행동을 기록하였다. 조선시대까지도 수령이 부임하거나 퇴임할 때 소요되는 비용은 백성들의 부담이었다. 성호(星湖) 이익(李瀷)은 지방에서 구임 수령을 보내고 신임 수령을 맞이하는 것이 매우 큰 폐단이라고 하였다. 그들을 호송하는 인부와 말 등 큰 비용을 백성들에게 거두니 매우 난감한 일이라고 하였다. 때문에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은 수령이 부임하거나 퇴임할 때 소요되는 비용을 국가 재정으로 충당하자는 개혁안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퇴임 수령을 전송하는 데 드는 비용이 만만치 않은 데다, 순천에서는 호송할 때 사용하는 말까지 수령에게 주었으니 그 부담은 더욱 큰 것이었다. 그런데 최석이 처음으로 그것을 거부하고 돌려주었다. 최석의 행동은 당시 사람들, 그리고 『고려사』를 지은 이들에게도 매우 큰 감동이었다. 최석은 이 행동 하나로, 천 년이 흐른 지금도 청렴함으로 그 이름을 후세에 남기고 있다.
[최석과 팔마비가 낳은 나비효과]
최석의 행동이 낳은 효과는 컸다. 관례가 깨진 것이다. 그 이후로 순천에서 지방관으로 근무하다 돌아가는 이들은 더는 관례라는 이유로, 죄의식 없이 여러 마리의 말을 골라서 가져갈 수 없었다. 그 혜택은 그대로 순천 사람들에게 주어졌다. 그들이 가져가는 말값은 결국 순천 사람들이 부담해야 하는 것이었기에, 그만큼 백성들의 부담이 줄어들었다. 순천 사람들은 그 공을 잊지 않고 돌에 새겨 세웠다. 그것이 ‘팔마비’였다. 비석 건립의 효과는 공을 기억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최석 이후의 순천부사들은 근무 중에 늘 팔마비를 대할 수밖에 없었고, 최석이 했던 일을 자세히 알았다. 순천부사들은 더는 말을 요구할 수도, 가져갈 수도 없었다.
세월이 흘러 팔마비가 쓰러지자, 충숙왕 때 승평부사로 부임한 최원우(崔元祐)가 다시 세우면서 지은 시를 보면 그러한 사정을 잘 말해주고 있다. 최원우가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승평부에 오가는 동안 계절이 바뀌었으니, 보내고 맞느라 농사철 빼앗는 것 부끄럽네. 후세에 전할 만한 덕 없다고 하지 말게나, 최석 수령의 팔마비를 다시 일으켰다네.”
최원우는 농번기에 부임해서 백성들의 농사지을 시간을 빼앗은 것이 부끄럽다고 하였다. 일종의 겸양이다. 수령의 교체로 인해 백성들의 부담을 늘려서는 곤란하다는 것, 그것이 지방 수령의 마음가짐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되새긴 대목이다. 그리고 그러한 다짐을 형상화한 것이 쓰러진 팔마비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이었다. 최원우는 이 업적만으로 어떤 수령에 뒤지지 않는 공덕을 세운 것이라고 자찬하고 있다.
고려 때 이러한 전통은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조선시대에는 친한 벗이 지방의 수령으로 부임하게 되면, 시를 지어 전송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벗이 순천부사로 부임할 때는 어김없이 팔마비를 거론하였다. 이와 관련해 가장 많은 시를 남긴 이는 사가 서거정(徐居正)이다. 서거정은 순천부사로 부임하는 이공(李公)[이름은 알 수 없음]을 전송하면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순천 사람들은 그곳을 소중화라 말하는데 연자루 앞 경치는 더욱 훌륭하도다. 팔마비가 지금도 거기에 있는지 모르지만, 훗날 그 누가 있어 그대보다 어진 정치를 펴겠나”
서거정은 순천이 풍속도 훌륭하고 경치도 아름답다고 인정하면서도, 특히 연자루 앞의 경치를 칭찬하고 있다. 이는 매우 중의적인 표현이다. 연자루 앞의 풍광이 아름답기도 하지만, 연자루 앞에는 바로 팔마비가 있었다. 이 시에서는 팔마비가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다고 하였지만, 서거정이 지은 다른 시인 「연자루」에서는 “연자루 앞에는 팔마비가 조용히 섰구나”라고 노래하였다. 서거정은 연자루 앞에 팔마비가 있음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 팔마비가 있는지 모르겠다고 한 것은 최석과 같은 청렴한 지방관이 이후에도 나왔는지 여부를 모르겠다는 것, 그리고 벗인 이공이 새로운 팔마비의 전통을 잇기를 기원하고 있는 것이다.
서거정의 팔마비에 대한 언급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서거정은 전라도관찰사로 부임하는 김영유(金永濡)를 전송하면서도, 팔마비를 언급하였다. 또 절도사로 부임하는 우현손(禹賢孫)을 전송하면서도 팔마비를 언급하였다. 심지어 송광사에 머무르기 위해 떠나는 수이 상인(守伊上人)을 전송하면서도, “팔마비 고사가 고금에 전해오고 있으니 상인께선 원대한 안목으로 살펴보게나 옛 현인의 청절(淸節)을 본받을 만하고말고.”라고 하였다.
조선 후기 들어서는 택당(澤堂) 이식(李植)과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이 팔마비를 언급하였다. 이식은 순천부사로 부임하는 정지우(鄭之羽)를 전송한 시에서, “맑은 바람 불어오는 팔마비로다.”라고 순천의 중요한 전통으로 팔마비를 말하였다. 김상헌은 이덕수(李德洙)의 신도비에서, “이덕수가 어버이가 연로하다는 이유로 봉양할 수 있게 해 주기를 청하여 순천현감(順天縣監)이 되어 나갔는데, 고을 사람들이 팔마(八馬)의 노래를 다시 부르면서 공의 아름다운 덕을 칭송하였다.”라고 적었다.
최석은 많은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최석의 구체적인 삶이나 행적은 전혀 알 수 없다. 그러나 승평부사의 임무를 마치고 돌아가면서 행한 단 하나의 행동, 관례로 주어지던 여덟 마리의 말을 받지 않고 돌려보낸 그 행동으로 인해 역사에 영원히 남는 인물이 되었다. 최석은 청렴한 관료요, 백성들에게 은덕을 베푼 목민관으로 기억되었다. 이러한 영광은 최석의 후임 관료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순천부사를 제수받은 이들은 임지로 떠날 때, 벗들로부터 팔마비에 대한 언급과 그에 뒤지지 않는 훌륭한 목민관이 되라는 당부를 받았다. 심지어 순천을 보지 못한 사람들도 팔마비와 최석에 얽힌 이야기에 대해서는 알았으며, ‘순천’ 하면 당연히 팔마비를 떠올릴 정도였다.
[팔마의 정신, 잊혀지 않다]
팔마정신을 기억하는 것은 외지인들만이 아니었다. 어찌 보면 최석의 행동으로 인해 가장 큰 혜택을 본 사람들은 바로 순천 사람들이었다. 퇴임 수령에게 말을 선물하는 폐단이 제거되었을 뿐 아니라, 이후의 수령들도 팔마정신을 의식하여 선정(善政)을 베풀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순천시에서는 지금까지도 순천의 정신으로 ‘팔마정신’을 들고 있으며, 매년 10월이면 팔마문화제를 개최하고 있다. 순천부의 관아가 있던 순천 원도심에서 순천시에서 활동하는 문화예술인들이 주축이 되어, 역사와 전통을 현대적으로 계승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축제이다. 순천 시장과 순천시민들이 한마음이 되어 청렴탑을 만들고, 거기에 청렴하게 살겠다는 서약과 다짐을 쓴 편지를 남기는 행사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원도심은 순천부의 관아터와 읍성터가 그대로 남아 있는 역사와 전통의 거리이다. 팔마비가 여전히 이곳을 지키고 있으면서, 순천사람들이 천년 가까이 지켜온 청렴의 전통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전통과 현대적인 문화와 예술 행사를 열고, 또 청렴에 대한 다양한 이벤트를 열어 순천의 새로운 미래를 기약하고 있다. 1300년대 최석이라는 지방관의 작은 날갯짓이 2000년대의 지금까지도 큰 폭풍으로 순천을 감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