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6010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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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拱北堂 |
영어공식명칭 | Gongbukdang Hall |
영어음역 | Gongbukdang Hall |
영어공식명칭 | Gongbukdang Hall |
분야 | 생활·민속/생활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전라남도 순천시 중앙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김현진 |
[정의]
전라남도 순천시 중앙동 순천부읍성에 있었던 조선시대의 누정.
[명칭 유래]
‘공북(拱北)’은 뭇 별들이 북극성을 중심으로 선회하는 것으로, 신하가 임금을 공경하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이는 『논어』「위정(爲政)」에 “덕으로 정사를 하는 것은 비유하면 북극성이 제자리에 머물러 있으면 뭇별들이 그곳으로 향하는 것과 같다[爲政以德, 譬如北辰居其所, 而衆星共之].”라고 한 데에서 나왔다. 따라서 공북당은 순천부사가 공무를 보는 관아 공간 중 하나이다.
[위치]
공북당은 순천읍성 내 아사(衙舍) 남쪽에 연지(蓮池)와 함께 있었다고 한다.
[변천]
공북당은 기문이 없어서 자세한 내력은 알 수 없다. 다만 송암(松巖) 이로(李魯)[1544~1598]가 1593년(선조 26) 3월에 곡식 2만 석을 수송해 오기 위해 호남에 간 적이 있는데, 이때 지은 것으로 보이는 「승평동헌우음이수(昇平東軒偶吟二首)」를 통해 임진왜란 당시 공북당이 존재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1610년(광해군 2) 순천부사로 부임한 유영순(柳永詢)[1552~1630]의 「공북당」 제영시를 시작으로, 홍천경(洪天璟)[1553~1632]·이수광(李睟光)[1563~1628]·김지남(金止男)[1559~1631]·이안눌(李安訥)[1571~1637]·유몽인(柳夢寅)[1599~1623]·서정순(徐正淳)[1835~1908] 등이 지은 차운시(次韻詩)를 통해 실존했음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 때 훼철되었다.
[현황]
공북당은 일제강점기 「조선시가지계획령」[1936] 때 훼철된 이후 현전하지 않는다.
[의의와 평가]
공북당은 관설 누정으로 순천부사의 공무 공간으로 활용되었기 때문에, 대체로 치도(治道) 자세에 대한 경계나 사군(思君)의 정회를 표출하는 공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