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600608 |
---|---|
한자 | 車云革 |
영어공식명칭 | Cha Un-hyeok |
영어음역 | Cha Un-hyeok |
영어공식명칭 | Cha Un-hyeok |
이칭/별칭 | 홍기(洪器),쌍청당(双淸堂),강렬(剛烈) |
분야 | 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라남도 순천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욱 |
[정의]
조선 전기 순천 출신으로 이시애의 난에 참전한 무관.
[가계]
차운혁(車云革)[1393~1467]의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홍기(洪器), 호는 쌍청당(双淸堂), 시호는 강렬(剛烈)이다. 아버지는 차견질(車堅質)이다.
[활동 사항]
차운혁은 고려 말 성리학의 대가였던 숙부 차원부(車原頫)[1320~?]가 하륜(何崙)[1347~1416] 등에 의해 살해되자 이에 연루되어 길주, 회령 등지를 전전하며 유배 생활을 하였다. 세종 때 차원부의 억울함이 밝혀져 신원이 회복되자 차운혁도 유배에서 풀려난 뒤 은거 생활을 하였다. 이후 어모장군 겸 사복시장에 임명되었다.
단종이 승하하자 관직을 사퇴하고 도봉산에 은거하던 중 1467년(세조 13)에 이시애(李施愛)[?~1467] 등이 길주(吉州)에서 반란을 일으켰을 때 선봉대장이 되어 토벌에 나섰다. 함경도 이성(利城)[현 함경남도 이원 지역의 옛 지명]에 이르러서 그 무리인 이시합(李施合)과 이시백(李施伯)을 사로잡았는데 마운령(摩雲嶺)에 이르러 부장(副將)인 최윤손(崔潤孫)이 반역하여 이시애 일당에 가담하여 차운혁과 정휴명(鄭休明) 등은 이시애에게 잡혔고 단천(端川)에서 순절하였다.
[학문과 저술]
차운혁과 관련된 기록으로는 ‘차운혁 쌍청당실기 목판(車云革 雙淸堂實記 木板)’[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57호]이 전해진다. ‘차운혁 쌍청당실기 목판’에는 차운혁이 행적과 의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일, 서원 관계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또한 당시 이시애의 난 진압상황과 조선시대 공신들에 대한 처우 등의 연구할 수 있는 자료이다.
[상훈과 추모]
차운혁은 1469년(예종 1) 적개공신(敵愾功臣) 2등으로 책훈되었다. 1860년(철종 11)에는 차운혁의 충절을 기리는 정려가 조정에서 내려졌다. 이 정려문은 현재 경기도 화성시 정남면 괘랑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