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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의 밑불 놓은 송문수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8C020101
지역 전라북도 고창군 공음면 구암리 구수마을|장동마을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임선화

공음면 구암리 장동마을 안길로 들어가면 하얀 조립식 주택과 흙벽으로 만들어진 창고 사이로 길이 이어진다. 이 길을 따라 올라가면 왼편에 대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서 있다. 이 대나무밭 뒤편에 개간된 밭이 옛 ‘송총’이다. 지금은 흔적마저 사라져 버린 ‘송총’의 주인은 누구일까? 송총의 주인은 바로 송문수이다.

[동학 농민 운동의 밑불을 놓다]

송문수(宋文洙)[?~1894. 12. 5]는 무장현 동음치면 당산리[현 구암리 구수마을] 출신으로 고부 농민 봉기 이전부터 전봉준과 더불어 동학 농민 봉기 모의를 함께했던 무장의 동학 접주이다. 그는 전봉준의 동학 농민군이 구암리 구수마을에 집결하여 본격적인 농민 봉기를 준비할 당시, 이동해 온 농민군의 행적을 숨기기 위해 구수마을에 난장[정해진 장날 외에 특별히 며칠간 더 여는 장]을 여는가 하면, 농민군의 훈련을 담당하는 등 농민군의 무장기포를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구수마을은 일제강점기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고 한다. 즉, 배가 드나들 수 있었다는 것이다. 송문수는 뱃길을 이용해 지금의 영광 홍농의 접주 김낙선과 함께 홍농에서 비금도, 하의도까지 되는 뱃길을 장악하였다. 전라도 서남해안 인근의 뱃길이 모두 동학 농민군의 영향 아래에 있었던 것이다.

또한 송문수는 무안 접주 배규인, 진도 접주 박중신과 힘을 합쳐 진도의 수영(水營)을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하였다. 이렇게 서남해안을 장악한 그는 관군과 일본군이 뱃길을 통해 동학 농민군이 장악한 지역으로 침투하는 것을 막으면서 전봉준의 동학 농민군 주력 부대의 움직임을 수월하게 해 주었다. 또한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에서도 7000명의 동학 농민군과 함께 무장에 남아서 관군과 일본군의 침투를 방어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렇게 전봉준을 적극적으로 도운 송문수는 1894년 12월 5일 홍농에서 동학군을 상대로 하여 지방의 양반이 중심이 되어 결성됐던 민보군 대장 이현숙에게 체포되었고, 이후 참수를 당하였다.

송문수의 시신은 참수되었기 때문에 머리가 없이, 구암리 장동마을 뒤편 대나무밭에 암장되었다고 전한다. 이 무덤은 장성으로 시집가 살아남은 딸에 의해 보살펴져 왔으나 현재는 이마저도 끊겨 버렸다고 마을 사람들은 전한다. 이제는 개간된 밭으로 변해 버린 송총을 보며, 100년 조금 지난 역사 속의 인물이 이렇게 방치되고 있는지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보제공]

  • •  전윤오(남, 1938년생, 공음면 구암리 구수마을 노인회장)
  • •  진윤식(남, 1945년생, 고창군 해리면 안산리 주민, 고창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부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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