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8008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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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裵煥廷 |
영어음역 | Bae Hwanjeong |
이칭/별칭 | 상삼(相三),남계(南溪)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전라북도 고창군 공음면 용수리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문병학 |
성격 | 동학 접주|동학 농민 혁명 지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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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전라북도 고창군 공음면 용수리 |
성별 | 남 |
생년 | 1864년 |
몰년 | 1922년 |
본관 | 달성 |
[정의]
개항기 고창 출신의 동학 접주이자 동학 농민 혁명 지도자.
[개설]
본관은 달성(達城)이며, 자는 상삼(相三), 호는 남계(南溪)이다. 1864년 무장현 와공면 청천[현 전라북도 고창군 공음면 용수리]에서 배후근(裵厚根)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활동사항]
배환정은 한약방을 경영했는데, 집안 형편이 어려운 환자에게는 약을 무료로 주고 노부모를 모시는 환자에게는 약값을 반액만 받았다. 이러한 활동으로 주변의 인심을 얻으면서 일종의 추대 형식으로 무장 접주가 되었다. 이후 배환정은 손화중(孫華仲)과 친하게 지내면서 지도급 인사로 부상하였다.
4월 7일 황토재 전투, 4월 23일 장성 황룡촌 전투에 참가했으며, 4월 27일 전주성에 들어갔다. 그리고 동학 농민군이 홍계훈이 이끄는 관군과 수차례의 접전 끝에 전주화약(全州和約)을 맺고 5월 7일 전주성을 내주고 퇴각할 때 고향에 잠깐 왔다가 나주성을 공격하는 최경선(崔景善) 부대에 합류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9월 우금치 전투에 참가했다가 패하자 숨어서 지냈다. 그런데 관에서 큰댁 조카인 참봉 배인기를 잡아 가자 조카를 대신해서 잡혀 들어갔다가 초토사 홍계훈을 통해 2백 냥을 내고 풀려났다. 이후 부안의 변산으로 들어가 5~6년을 지내다가 다시 한약방을 열어 생계를 유지하였다. 배환정은 평소 베푼 인덕으로 다시 재기할 수 있었고, 다른 동학 농민군과는 달리 일제 강점기에 천석꾼지기가 되었다. 증손자 배인수가 고창동학농민기념사업회에서 부회장으로 활동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