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8007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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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柳翊商 |
영어음역 | Yu Iksang |
이칭/별칭 | 상경(商卿),삼소당(三笑堂)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노동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노석 |
성격 | 유학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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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노동리 |
성별 | 남 |
생년 | 1659년 8월 7일 |
몰년 | 1729년 9월 18일 |
본관 | 고흥 |
[정의]
조선 후기 고창 출신의 유학자.
[가계]
본관은 고흥(高興). 자는 상경(商卿), 호는 삼소당(三笑堂). 관란(觀瀾) 유춘발(柳春發)의 현손으로, 증조할아버지는 생원 유동현(柳東賢)이고, 할아버지는 통훈대부 유철견(柳鐵堅)이다. 친아버지는 유교령(柳喬齡)이고, 양아버지는 생원 유만령(柳萬齡)이며, 양어머니는 해미곽씨(海美郭氏)로 곽성구(郭聖龜)의 딸이다. 부인은 전주이씨(全州李氏)로 이임한(李任漢)의 딸이다.
[활동사항]
유익상(柳翊商)은 4세 때인 1661년(현종 3) 어머니를 여의고 백부 춘수당(春睡堂) 유만령에게 양자로 들어갔다. 그는 양아버지의 가르침을 계승하여 문학과 예학에 밝았다. 생부모와 양부모, 조부모 등을 효성으로 시봉하였고, 상을 당하면 한결같이 『주문공가례(朱文公家禮)』대로 집행하고 3년의 시묘를 거행했다.
자질들에게는 효우(孝友)로써 지도하고 벗을 사귐에는 신의로써 하도록 교육했다. 그는 형 유익하(柳翊夏), 동생 진사 유익한(柳翊漢) 등을 비롯하여, 감역(監役) 신원만(愼元萬)과 이덕휘(李德輝) 등 당시의 명유들과 교유하였고, 만년에는 무장현의 동쪽 방장산 아래에 있는 예천동(醴泉洞)에 몇 칸의 집을 마련하여 삼소당이라 편액하고 그 곳에서 도의(道義)를 강마(講磨)하고 시율을 읊으며 유유자적하였다.
또 그에게 배우러 오는 친척의 자제나 문생들에게는 반드시 『소학(小學)』과 『효경(孝經)』을 가르치고 다음에 경전을 지도했다. 그는 평생 동안 산수 사이에서 은둔하며 수신제가하는 자기의 분수를 지키고, 종족이나 향리에서 애경사가 있으면 예절에 맞추어 거행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사례(四禮)에 대한 여러 제도나 규칙 등을 정하여 모두가 그것을 지키도록 하니 가족과 향민이 준수하였고, 그를 향선생이라 부르면서 존경하였다. 1729년(영조 5) 9월 18일 향년 71세로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1703년(숙종 29) 10월에 아우 유익주(柳翊周)가 세상을 떠나자 「제생정숙제익주문(祭生定叔弟翊周文)」을 지었고, 1706년(숙종 32) 고숙이 세상을 떠나자 「만내구어공대숙(挽內舅魚公大叔)」이란 시를 지었다. 1716년(숙종 42) 「제최상사호상문(祭崔上舍虎相文)」을 지었으며, 다음해 2월 「삼소당기(三笑堂記)」를 지었다. 1718년(숙종 44) 아들이 죽자 「제망자문(祭亡子文)」을 지었고, 1721년(경종 1) 여름에 「양곡고괴수언절내감음일율(暘谷古槐樹偃折乃感吟一律)」과 「회한경소차고운영선(會漢卿所借古韻詠蟬)」 등의 시를 지었다. 1725년(영조 1) 「만조군명휴(挽曺君命休)」란 시를 지었고, 다음해 봄 「자화호운(煮花呼韻)」을 지었다. 1727년(영조 3) 3월에 「근만족형시원(謹挽族兄時遠)」을 지었으며, 5월에 「제생정계제익한문(祭生定季弟翊漢文)」과 10월 25일에 「유씨문안서(柳氏門案序)」를 지었다. 저서로 『삼소당유고(三笑堂遺稿)』 1책이 『유씨세고』에 합철되어 전한다.
[묘소]
묘소는 전라북도 고창군 오동면에[현재 고창읍 도산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