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8310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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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曺庶 |
영어공식명칭 | Jo Seo |
이칭/별칭 | 여중(汝衆),청간(淸澗)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라북도 고창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병렬 |
활동 시기/일시 | 1371년 - 조서 신해방 동진사 15위로 문과 급제 후 부윤 임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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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397년 1월 - 조서 중서문하성 낭사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397년 8월 - 조서 좌산기상시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398년 - 조서 명나라 운남 금치에 유배 |
활동 시기/일시 | 1404년 - 조서 명나라에서 귀국 |
사당|배향지 | 정산사 -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월암리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창녕 |
대표 관직 | 예조전서 |
[정의]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월암리 정산사에 배향된 조선 전기 문신.
[가계]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여중(汝衆). 창녕 조씨 시조인 조계룡(曺繼龍)과 평장사(平章事) 조자기(曺自奇)의 후손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소감(少監) 조준(曺俊)이고, 할아버지는 소감 조인취(曺仁取)이며, 아버지는 판종부시사(判宗簿寺事) 조원유(曺元宥)이다.
[활동 사항]
조서(曺庶)는 야은(壄隱) 전녹생(田祿生)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371년(공민왕 20) 신해방(辛亥榜) 동진사(同進士) 15위로 문과에 급제한 후 부윤(府尹) 등을 지냈으며, 1394년(태조 3) 태조의 명으로 왕씨의 복을 빌기 위하여 전 예의판서(禮儀判書) 한이(韓理), 전 우윤(右尹) 정구(鄭矩), 봉상경(奉常卿) 조서, 전 헌납(獻納) 권홍(權弘), 전 사복주부(司僕注簿) 변혼(卞渾) 등에게 명하여 금으로 『법화경(法華經)』 4부를 써서 올렸다.
1397년(태조 6) 1월 중서문하성의 낭사(郎舍) 정3품 우산기(右散騎), 8월 문하부에 속한 정3품 낭사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 이어 정3품인 예조의 전서(典書)를 역임하였다. 당시 태조가 조서에게 『서경(書經)』 「홍범(洪範)」을 써서 바치게 하였다. 1395년 명나라가 정총(鄭摠)이 가져간 표사를 문제 삼자 표전문 계본을 썼던 조서는 1398년 명나라에 불려가서 운남 금치에 유배되었다. 1399년(정종 1년) 정총(鄭摠)과 김약항(金若恒)은 명나라 태조에게 억울한 죽음을 당하였고, 조서와 오진(吳眞), 곽해룡(郭海龍)은 억류되었다. 1404년(태종 4) 명나라에서 귀국하였으나 모친상을 당하여 관직에 나아가지 않다가 후에 보문각직제학(寶文閣直提學) 등을 역임하였다.
[학문과 저술]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광무(光武)라는 연호를 쓰며 황제에 올랐던 1897년(고종 34) 10월 21일 원세순이 올린 상소문에 “……왕위에 오른 후 중서성사인(中書省舍人) 조서를 시켜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지어서 연회 때의 악곡으로 올리게 하였습니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이를 통해 조선 전기 정4품 중서문하성의 사인(舍人) 조서가 「용비어천가」를 지었음이 확인되었다. 문장에 뛰어나 『청구풍아(靑丘風雅)』, 『명신록(名臣錄)』에 이름이 올랐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청간(淸澗)이다.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월암리에 있는 정산사(鼎山祠)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