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831088
한자 金軸
영어공식명칭 Kim Chug
이칭/별칭 남계(南溪),고언(高彦)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전라북도 고창군 해리면 방축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병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14년연표보기 - 김축 출생
몰년 시기/일시 1593년연표보기 - 김축 사망
추모 시기/일시 1605년 4월 16일 - 김축 『선무원종공신록』에 서훈
출생지 무장현 - 전라북도 고창군 해리면 방축리지도보기
묘소|단소 어사각 -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모양성로 76[교촌리 242]지도보기
사당|배향지 충현사 -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 교흥리지도보기
성격 의병
성별
본관 김해

[정의]

조선 후기 전라북도 고창 출신의 의병.

[개설]

김축(金軸)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가솔과 후학을 거느리고 김천일(金千鎰)의 막하에서 활약하다 이듬해 진주성 싸움에서 순절하였다. 대를 이를 큰아들만 집에 남기고 집안의 남자들이 모두 출진하여 6충, 1효, 4열부를 배출하였다.

[가계]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고언(高彦), 호는 남계(南溪). 덕원군의 21세손으로 아버지는 함안군수 김응시이다. 아우는 김헌(金軒)·김윤이고, 슬하에 김남·김기경·김우남 삼 형제를 두었다.

[활동 사항]

김축은 1514년(중종 9) 무장현[현 전라북도 고창군 해리면 방축리]에서 태어났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무장현에서 의곡을 모아 의병을 일으켰다. 김축이 왜군에 항전하는 의기를 높이 세우자 아우 김헌·김윤, 종제인 김사모, 삼종제인 김대인과 아들인 김남·김기경·김우남 삼 형제, 손자인 김흥립·김영립, 동생 김헌의 아들인 김두남·김지남, 김두남의 아들인 김덕립·김효립, 김사모의 아들 김억명·김억룡·김억호 삼 형제, 근친인 김치모·김세근·김나복·김인복·김신문·김극구·김응추·김국서 등의 일족과 가동 및 마을 사람 수백 명이 김축을 따라 전쟁에 참여하였다.

김축은 80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아들, 조카들과 함께 웅치(熊峙) 전투, 이치(梨峙) 전투에 참전하여 전공을 세웠다. 전쟁이 잠시 멈추자 귀가했다가 1593년 1월 25일 진주성으로 출발하였다. 김축은 창의사 김천일의 추천으로 조방장(助防將)의 소임을 맡았고, 김지남은 전라우도 조방장이 되었다.

김지남의 전장 일기에 따르면, 삼숙질(三叔姪)이 진주에 당도한 5월 1일부터 6월 16일까지 싸우지 않은 날이 없었고, 수차례에 걸쳐 큰 공훈을 세웠다. 5월 20일에는 왜군 5만 대군이 성을 포위하여 귀갑차(龜甲車)를 앞세워 맹공격해 왔다. 5월 29일 성벽을 타고 왜군이 넘어오자 격전을 벌였으나 적에게 포위당해 김축이 죽자 이질(二姪)은 의병장들과 함께 남강에 투신하여 순절하였다. 이에 사노(私奴) 언지(彦之)가 「제석진관문(帝錫陳關文)」과 「절형장군 조방 장교지(折衡將軍 助防 將敎旨)」 및 전장 일기 등의 유물을 수습하여 본가에 전하고 다음 날 절명하였는데 사지가 온통 상처뿐이었다고 한다.

김축의 남은 일족은 계속하여 각지의 전투에 참전하여 25명이 모두 순국하였다.

[상훈과 추모]

1605년(선조 38) 4월 16일 조선 조정에서 김축과 함께 순국한 이들을 『선무원종공신록(宣武原從功臣錄)』에 서훈하여 『단서철권(丹書鐵券)』을 내리고, 이를 봉안할 수 있는 어사각을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모양성로 76[교촌리 242]에 세웠다. 김축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 교흥리에 있는 충현사(忠賢祠)에 배향되었다.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