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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831081
한자 庾資諒
영어공식명칭 Yu jalyang
이칭/별칭 담연(湛然)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전라북도 고창군 성송면 하고리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이병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150년연표보기 - 유자량 출생
활동 시기/일시 1213년 - 유자량 좌복야 임명
몰년 시기/일시 1229년연표보기 - 유자량 사망
출생지 무장현 - 전라북도 고창군 성송면 하고리지도보기
부임|활동지 용강현 - 남포특별시 용강군
성격 문신
성별
본관 무송
대표 관직 상서성 좌복야

[정의]

고려 후기 전라북도 고창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무송(茂松). 자는 담연(湛然). 할아버지는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郎平章事) 유필(庾弼)이며, 아버지는 공부시랑 유응규(庾應圭)이다. 아우는 금자광록대부 회부시랑을 지낸 유세겸(庾世謙)이다. 큰아들은 이규보와 친교가 두터운 유경현(庾敬玄)이며, 그 아래로 유정규와 유정현을 두었다. 『고려사(高麗史)』에는 유응규유자량이 형제로 되어 있으나 부자지간이다.

[활동 사항]

유자량(庾資諒)은 1150년(의종 4) 지금의 전라북도 고창군 성송면 하고리에서 태어났다. 성품이 장중하고 말이 없었다고 한다. 16세 때 무신들의 심상치 않은 동향을 파악하고 일부 무인 자제들을 자신이 가입한 유가 친목 단체에 가입시키고자 하였다. 이때 유가 자제들이 반대하자 유자량이 설득하여 가입시켰고, 정중부(鄭仲夫)가 무신의 난을 일으켰을 때 유자량이 속한 유가 친목 단체 계원은 이 일로 화를 모면할 수 있었다고 한다.

유자량은 선대의 덕으로 수궁서승(守宮署丞)이 되었으며, 이어 대악서승(大樂署丞)을 거쳐 용강현령(龍岡縣令)이 되었다. 용강현령 재직 시 행정을 올곧게 처리하여 백성들이 널리 칭송하였다. 그 후 정6품의 상의국(尙衣局) 봉어(奉御), 종5품으로 풍속의 교정 및 규찰 탄핵의 임무인 시어사(侍御史), 호구·공부(貢賦)·전량(錢糧)의 정사를 담당하던 호부의 낭중, 어사대의 종5품 관직인 어사잡단(御史雜端)을 거쳐 재화의 저장과 상세(商稅)의 징수를 관장하던 관서인 대부시의 종4품인 대부소경(大府少卿), 형부의 차관급인 시랑(侍郎), 대부시의 종3품인 대부경(大府卿), 국가 전곡(錢穀)의 출납과 회계를 관장하던 삼사의 지삼사사(知三司事), 태자의 서무를 관장하는 정3품의 태자첨사(太子詹事), 조회와 의례를 맡아 보던 관서의 장으로 정3품인 판각문사(判閣門事), 조정의 다례(茶禮)를 거행하는 지다방사(知茶房事) 등 내직과 외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213년(강종 2) 상서성(尙書省)의 정2품인 좌복야(左僕射)가 된 뒤 아버지의 벼슬을 넘어서는 안 된다 하여 더 이상 올라가지 않았다.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유자량은 기로소의 원조인 기로회를 만들어 왕에게 자문을 하였다. 1229년(고종 16) 사망하였다.

고창 토성인 무송 유씨는 고려 시대에 역사적 인물을 많이 배출하였으나 조선 건국 후 관리로 출사하지 않았다고 한다. 한편, 충청남도 태안군의 마도 해역에서 발견된 유물선인 마도2호선에서 ‘대경 유택상 고부군 전출중미 일석입십오두 차지 외우(大卿 庾宅上 古阜郡 田出中米 壹石入拾伍斗 次知 畏祐)’라는 문구가 쓰인 목간이 발견되었다. 종3품의 대경을 지낸 무송 유씨는 유자량밖에 없다. 마도2호선의 ‘대경 유택상’으로 기록된 물품들은 모두 개경의 유자량에게 가던 물건임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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