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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831001
한자 望梧臺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유적/터
지역 전라북도 고창군 성송면 학천리지도보기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백원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각석|암벽

[정의]

전라북도 고창군 성송면 학천리 추산봉에 있는 각석.

[개설]

망오대는 전라북도 고창 출신의 독립운동가 최전구(崔銓九)가 1918년 ‘지은최공전구망오대(智隱崔公銓九望梧臺)’라는 글자를 새기고 매년 지역의 선비들과 모여 추모 의식을 거행하였던 암벽이다.

[변천]

최전구는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의 문하생이었다. 1906년 최익현이 태인의 무성서원에서 의병을 일으킬 때 적극 참여하여 스승을 도왔다. 최익현과 함께 대마도에 유배되었고, 이곳에서 최익현이 죽자 스승의 장례를 치르고 삼년상을 지낸 뒤 고향에 돌아와 항일운동에 더욱 앞장섰다. 1910년(순종 4) 왜적의 침략 행위를 십대죄목(十大罪目)으로 규정하고 일본의 군왕에게 통고문을 보내려다 체포되었다. 이후 욕지도에 1년간 유배되었다. 1911년 동지들을 규합하여 광복단(光復團)을 조직하고 의금부순찰사로 활동하다 1917년 12월 28일 붙잡혔다. 이로 인해 다시 영종도에 1년간 유폐되기도 하였다.

대한제국이 망하자 최전구는 일제에 항거하며, 일제의 신민이 되지 않겠다는 뜻으로 민적 등록을 거부하고 단발령을 거부하며 마을의 집을 떠나 이곳 추산봉 중턱의 바위에 의지하여 움막을 짓고 거처하였다. 1918년 고종이 승하하자 최전구는 한양을 바라보며 세상을 떠난 황제를 추모한다는 뜻으로 움막 옆 암벽에 ‘망오대’라는 글자를 새기고 매년 지역의 선비들과 모여 추모 의식을 거행하였다. 당시 최전구와 뜻을 같이하며 의식을 거행하던 사람들은 모두 14명으로 권중규, 권석규, 서치문, 봉인학, 정휴직, 김천현, 권영옥, 최익렬, 정휴문, 이병중, 정영원, 최준식, 봉택규, 김기환이었다. 이들의 이름은 모두 망오대 옆 석벽에 새겨져 있다.

광복 후 움막 자리에 최전구망오대 의식에 참여하였던 최전구의 후손과 14명의 선비 후손들이 함께 유허비를 세웠다.

[위치]

전라북도 고창군 성송면 학천리 어림마을 뒷산 추산봉의 중턱에 있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추산봉에 망오대라고 각인한 최전구가 근세 인물이어서 학천리 마을 주민들의 안내를 받아 망오대를 직접 확인하고 전해 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현황]

2020년 현재 최전구가 거처하던 움막은 남아 있지 않다. 학천리 최전구의 고택 앞쪽 추산봉 망오대 유적지 입구에 최전구 기적비가 세워져 있다.

[의의와 평가]

국권 피탈 전후에 전개했던 최전구의 항일운동 사적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이며, 아울러 최전구의 항일 투쟁에 동참했던 사람들의 구체적인 명단을 확인할 수 있는 곳으로 의미가 크다.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20.12.21 개설 수정 지은최공전구망오대('智隱崔公銓九望梧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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