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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801242
한자 公所
영어음역 Gongso
영어의미역 Mission Station
분야 종교/기독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북도 고창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백원철

[정의]

전라북도 고창군에 있는 본당보다 작은 천주교회.

[개설]

공소는 신부가 상주하지 않기 때문에 미사가 집전되지 못하고 대신에 공소회장을 중심으로 첨례를 보거나 공소 예절이 행해지며, 정기적인 신부의 방문을 통해서 성사가 집행된다. 고창 지역의 경우 연이어 가해지는 박해를 피해 신자들이 고향을 등지고 멀리 떠났기에, 신유박해[1801] 이후 병인박해[1866~1874]에 이르기까지의 교회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으며, 병인박해 이후 타 지역에서 피난 온 신자들에 의해 교우촌이 형성되어 공소가 생겨나게 되었다.

[변천]

고창 지역은 병인박해 전후로 주로 충청도 지역에서 이주해온 신자들에 의해 교우촌이 형성되었는데, 신앙의 자유가 온전히 허용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산간 지역이나 인적이 드문 오지에 모여 살면서 공소를 세우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교회 측의 기록에 의하면 1880년대에 점골공소[신림면 외화리], 신수동공소[고창읍 월산리 회굿재], 무재동공소[흥덕면 치룡리], 바내미공소[아산면 반암리 소반바우] 등 4개의 공소가 세워졌으며 리우빌 신부가 담당하였다.

1890년대에는 가평공소[신림면], 갈촌공소[신림면 가평리 갈재 밑], 팔와촌공소[고수면 와촌리] 등 3개의 공소가 세워졌으며 김제 수류본당에서 담당하였다. 1900년대에는 대촌공소[흥덕면 후포리 죽촌], 가섭공소[고수면 은사리], 석산공소[무장면 강남리] 등 3개의 공소가 세워졌으며 김제 수류본당과 정읍 신성리본당에서 관할하였다.

1900년대에 신앙의 자유가 주어지고 곳곳에 본당이 세워지자 신자들이 고향을 찾아서 돌아가거나, 신앙생활 하기에 용이한 곳과 생업에 종사하기 유리한 곳을 찾아 떠나게 되어 이들 대부분의 공소는 자연 소멸되기에 이르렀다. 이중 광복 후까지 유일하게 남아 있던 공소가 신수동공소였다. 위치가 장성과 고창의 경계에 있는 산간 오지였음을 감안하면, 장성과 고창의 신자들이 피난하여 이룬 교우촌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일제 강점기를 거쳐 광복이 되었을 때까지도 산골의 공소에서 김제나 정읍 또는 장성 본당 신부들의 관할 하에 신앙생활을 이어갔다. 1948년에는 정읍본당 김후성[프란치스코] 신부의 주선으로 모양성 동문 밑에 작은 기와집 한 채를 구입하여 고창공소가 설립되자 신수동공소의 신자들은 이곳으로 옮기게 되었다. 그리고 1960년 고창본당이 설립되자 본당의 신자가 되었다. 따라서 고창본당의 모태가 바로 신수동공소였음을 알 수 있다.

1960년 3월 교구청의 방침에 의해 초대 주임 김영일[아우구스티노] 신부가 임명되었으며 고창읍 남정리 성남마을에 성당이 건축되었다. 1962년에는 2대 주임 벨기에 출신 배영근[요셉 화이엔] 신부가 부임했으며 부안 상암리의 간척 사업을 통해 확보한 44만 6280㎡ 규모의 농지를 농토가 없는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1965년에 신광공소가 세워졌다. 이어 1967년에는 해리면의 나성공소와 심원면의 심원공소가, 1968년에는 안현공소가 세워졌다. 이후로도 교세가 확장되어 1985년에 해리공소, 1987년에 용반리공소[1999년 줄포선교본당으로 이관], 2001년 고창군부대공소가 세워졌다.

[현황]

2010년 현재는 교통이 편리해져 대개는 본당에서 미사를 직접 보고 있는데다 이농 현상으로 신자들이 거주 지역을 떠나게 되어 공소의 기능이 점차 축소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고창본당 관할 공소는 1947년 설립된 나환우[한센인] 공소였던 동혜원공소[고창읍 죽림리], 신광공소, 심원공소, 안현공소 만이 유지되고 있다. 그리고 이들 공소마저도 신자 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 실정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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