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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800794
한자 崔汝謙
영어음역 Choe Yeogyeom
이칭/별칭 최마티아
분야 종교/기독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종교인
지역 전라북도 고창군 공음면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백원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천주교 순교자
출신지 전라북도 고창군 공음면
성별
생년 1763년연표보기
몰년 1801년연표보기
본관 전주

[정의]

조선 후기 고창 출신의 신유박해 순교자.

[가계]

본관은 전주(全州). 세례명은 마티아, 여겸(汝謙)은 자라고 한다. 무장현 동음치면[현 전라북도 고창군 공음면]에 거주하고 있던 전주최씨 현감공파의 후손이라고 전해지고 있으나 현재 상세한 계보는 확인되지 않는다.

[활동사항]

최여겸(崔汝謙)은 25세 때인 1788년(정조 12) ‘전라도의 사도’라고 불리는 유항검을 찾아가 천주교 교리를 배운 뒤, 충청도 한산으로 장가를 가서 다시 ‘내포의 사도’라고 불리는 이존창을 만나 교리를 배우면서 신앙심이 더욱 공고해졌다. 처가살이를 마치고 고향 무장으로 돌아온 그는 교회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며 열심히 복음을 전파하여 많은 사람들을 입교시켰다.

신유년인 1801년(순조 1) 정월에 박해가 일어나자 그는 처가가 있는 한산으로 피신하였으나 발각되어 그 해 4월에 체포되었다. 처음 한산관아에서 심한 고문을 받았으며, 무장으로 이송된 뒤 다시 전주감영으로 옮겨졌다가 또다시 서울 형조로 압송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각각 배교(背敎)를 강요당하며 심한 문초와 형벌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한결같이 “십계명을 버릴 수 없고 죽음을 택하겠다.”라고 하며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이에 형조에서는 그 해 음력 7월 13일 해읍정법(該邑正法)의 명을 내렸다. 곧 본래 살았던 거주 지역에서 형을 집행하라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그는 다시 무장으로 이송되어 이 고을 장터인 개갑장터에서 7월 19일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당시 38세였다.

당시의 개갑장은 영광 법성포가 가까운 거리에 있었고, 또 장터 바로 지근거리에 석교창이 있어 배가 드나들었으며, 신안군도 등 섬들에서 키운 소를 배에 싣고 와 파는 우시장이 설 정도로 규모가 컸다고 전한다. 이때의 박해에서는 최여겸의 가르침을 받고 천주교도가 된 신자들도 함께 붙잡혀 형벌을 받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최여겸에 의해 신자가 된 사람이 모두 28명에 이른다고 밝혀졌다. 그 중 기록에 의해 확인되는 경우를 보면, 무장의 최수천[횡성에 유배], 최일한[전주에서 형벌로 죽음], 흥덕의 김처당[청도에 유배], 영광의 이화백[영광에서 순교], 함평의 남중만[평산에 유배] 등이 있다.

2010년 6월 현재 최여겸은 ‘순교자 124위와 최양업 신부 시복시성’ 대상자에 선정되어 로마 교황청에 청원되어 있는 상태이다. 한편, 박해 이후 최여겸과 그 신자들의 후손들은 그 후에도 연이어 일어나는 박해로 인해 모두 피하여 흩어졌기 때문에 지금 그 후손들을 찾기는 매우 어려운 상황이나 다행히 근래에 최여겸의 후손이 된다는 사람들이 나타나 당시의 상황을 증언, 앞으로 관련 자료 등을 추적하여 면밀하게 조사 연구하면 순교자의 가계와 후손들을 찾을 수도 있으리라 본다.

[묘소]

고창군 공음면전주최씨의 가족묘가 조성되어 있는 바, 그 중에는 최여겸의 선대조의 묘소도 있다고 한다. 순교자의 경우는 묘비나 표지를 세울 수 없기에 현재 순교자의 묘를 확인할 길이 없으나, 혹 그 가운데 있지 않을까 추정되며, 역시 연구가 요청되는 사항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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