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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800790
한자 義雲和尙
영어음역 Uiunhwasang
영어의미역 Monk Uiunhwasang
분야 종교/불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종교인
지역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삼인리 605[도솔길 194-77]지도보기
시대 고대/삼국 시대
집필자 배옥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승려
성별

[정의]

삼국 시대 참당암(懺堂庵)을 창건한 승려.

[개설]

의운화상(義雲和尙)은 신라 진흥왕 때에 활약했던 승려라는 설과 백제의 승려라는 설이 있기도 하나, 관련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정확하게는 알 수 없다. 신라 시대 선운산 도솔암 앞 법화굴(法華窟)에서 수도하던 중 꿈에 우진국 왕의 계시를 받아 돌배에 싣고 온 불경과 불상, 보인(寶印) 등을 인수받은 뒤 진흥왕의 시주를 얻어 지금의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삼인리 605번지[도솔길 194-77]에 참당암[일명 대참사]를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활동사항]

「대참사 사적기」에 의하면 대참사는 신라 때에 의운화상이 창건하였다고 적고 있다. 대참사란 의운화상의 ‘성전 참회 발원’에 의한 절이라는 뜻에서 이름을 얻은 것으로, 대참사는 지금의 참당암을 일컫는다. 「대참사 사적기」에 그 창건 설화가 실려 있는데 이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이 산에는 동쪽 고개 위에 수십 인이 앉을 만한 평평한 암반이 있고 그 밑에는 백여 명이 들어 있을 만한 고왕굴(高王窟)이 있다. 그 앞 층암을 오르면 정상에서 해악(海嶽)이 한눈에 전망되는데 여기에 천상굴(天上窟)이 있으며, 그 남쪽으로 수백 보 거리에 촉석이 둘러 있는 곳에는 이무기가 살고 있던 용담(龍潭)인 아뇩지[阿耨池]가 있다. 또 여기에 도솔당이 있는데, 좌대와 같이 넓은 대암과 병풍과 같이 깎아 세운 듯한 암벽이 사면을 두른 가운데 학이 깃들고 용이 머문 듯하면서 송풍라월(松風蘿月)의 기이한 형관이 형용할 수 없다.

도솔암의 좌편에 열석굴(裂石窟)이 있다. 신라 왕이 왕위를 피하여 이 산속의 굴에서 수도하고 있는데, 꿈에 미륵삼존(彌勒三尊)이 암석을 깨고 출현하는 것을 보고 드디어 여기에 사찰을 세우도록 현기(玄機)를 내렸다. 중애사(重愛寺), 선운사도솔암 등이 그때 창건된 것이다.

여기에 문수사(文殊寺)는 옛날 중국의 신승 한산(寒山)과 습득(拾得)이 유희하던 곳이라고 하며, 운령사(雲嶺寺)와 개심사(開心寺)는 바로 개산 조사인 의운화상이 수도한 도량이다. 원래 도솔암 앞에 법화굴이 있었는데, 의운화상이 머물면서 수도하던 곳이라 한다. 이때 산 아래 죽도(竹島)의 포구에 한 척의 돌배가 와 닿았는데, 그 배에서 음악 소리가 들려왔으므로 이상하게 여겨 마을 사람들이 가까이 가서 보려고 하면 그 배가 물러가 버렸다. 이 말을 들은 의운화상이 그 배 안에 들어가니 옥축대장(玉軸大藏)과 석가모니 불상과 가섭(迦葉) 존자·아난(阿難) 존자 등 16나한상이 배 안에 병렬되어 있고, 또 금인(金人) 한 사람이 오른손에 옥으로 된 돛대를 잡고 비단으로 된 돛을 펼치고 있으며, 왼손에 아주(牙籌)와 금자(金字)로 된 보인을 잡고 배 위에 서 있었다.

의운화상이 그 사람에게 육지에 내려 불상 등을 봉안할 것을 의논하려 했으나 마땅한 도량을 정하지 못하여 별 수 없이 돌아왔다. 그런데 그날 밤 의운화상의 꿈에 그 금인이 나타나 말하기를, ‘나는 우전국(于闐國) 왕인데 불경과 불상을 봉안할 성지를 보기 위해 동해의 여러 곳을 편력하던 중 이곳 선운산에 대참(大懺)의 빼어난 기운이 있고, 용당이 세워질 신령스러운 기운이 하늘에 뻗쳐 있음을 보고 이곳에 이르렀으니, 원컨대 대사께서는 이곳에 사찰을 창건하여 이 경상을 봉안케 하라.’ 하였다. 이에 의운화상은 금인에게서 불경과 불상 및 나한상, 그리고 아주와 금자 보인을 받아, 이 산 가운데 길이 봉정할 도량을 택하여 진흥왕의 시주를 얻어 가람을 개창하였다. 이곳이 바로 참당암이라고 한다.

그리고 참당암을 일으킨 다음에 존상을 봉안하기 위하여 용담(龍潭)에 살고 있던 이무기를 몰아내고 그곳에 다시 하나의 암자를 세웠는데, 용이 나온 곳이라 하여 기출암이라 하였다. 또한 용담에서 나온 이무기를 몰고 간 사자(使者)가 흥성(興城) 땅 방등산(方等山)에 이르러, 이 도량에 불법이 흥성하게 된 연유는 의운화상의 대발원에 의한 것으로, 선운사의 대중들이 대참사의 유나(維那)로부터 강주(講籌)를 받게 되고 중애사의 집강(執綱)에서 수도를 하게 되니, 중애사는 실로 이 선운산 여러 사암의 중추가 되었다고 한다.”

이상의 기록을 통해 신라 승려 의운화상은 당(唐) 정관(貞觀) 연간에 서역의 우전국에서 전래한 불상과 불경 및 아주·보인을 대참사에 모셨으며, 신라 진흥왕의 시주로 몇 개의 사암을 건립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몇 가지 의문점이 제기되어진다.

첫째, 어떻게 백제 땅에 신라의 왕실에서 후원하여 사찰을 조성할 수 있었을까 하는 점이다. 임우상의 「대참사 법당기」에는 대웅전의 창건 연대로 기록된 정관 연간은 서기 627년부터 649년까지인데, 이는 백제 무왕 10년부터 의자왕 9년까지의 기간에 해당하는 것으로, 신라는 진평왕 49년부터 진덕여왕 3년까지의 치세 시기이다.

백제의 성왕[재위 523~554]은 진흥왕과 연합하여 고구려로부터 한강 유역을 빼앗아 서로 나누었는데, 채 3년이 지나지 않아 신라가 한강 유역의 반쪽 백제 땅을 점령함으로써 나제동맹이 결렬되었다. 이에 성왕은 옛 땅을 회복하기 위해 신라를 침공하였으나 관산성(管山城) 전투에서 끝내 전사하고 왕자만 간신히 살아 돌아와 위덕왕[재위 554~598년]으로 즉위하였다. 백제 무왕 대에는 전제 왕권의 확립을 위하여 청동기시대 이후 남부 지방의 문화 중심지이며 교통 요지인 익산에 별도(別都)를 건설하고 제석사(帝釋寺)와 미륵사(彌勒寺)를 경영하였다.

따라서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고창 지역도 백제의 세력권 속에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당시는 삼국 간의 치열한 영토 분쟁으로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였으므로 신라의 국왕이 왕위를 양위한 후 위험을 무릅쓰고 적국인 백제 땅에 들어와서 수도하고 사찰을 세웠다고 하는 기록은 당시의 정황으로는 타당성이 매우 적다.

둘째, 대참사의 대시주였던 신라의 진왕이 과연 누구인가의 문제이다. 호월자의 「대참사 사적기」에는 신라 진흥왕의 시주를 얻어 대참사를 개창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진흥왕은 재위 5년에 흥륜사(興輪寺)를 세우고, 10년에는 양(梁)에 승려를 보내어 불사리(佛舍利)를 들여오고, 14년에는 황룡사를 지어 장육상(丈六像)을 조성하였으며, 또 법사를 수(隋)나라에 보내 호승(胡僧)을 맞아들이고 불경과 불사리를 들여오는 등 불교 발전에 힘썼다. 만년에는 왕위를 버리고 출가하여 수행자로서 불문에 전념하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백제의 왕녀를 취하여 소비(小妃)로 삼는 등 백제와 교혼 관계가 있었으며, 백제 땅을 주유할 기회도 있었다고 한다. 임우상의 「대참사 법당기」에 당 태종 정관 연간에 신라 진왕의 시주를 받아 대참사를 창건하였다고 하는 기록에 비추어 창건 연대에 초점을 맞추어 보면, 당시 신라는 진평왕의 치세였고, 그의 뒤를 이어 진덕여왕이 즉위하였기 때문에 앞서 언급한 진왕은 진평왕 또는 진덕여왕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자신과 아무 연고가 없는 이곳을 자신의 정주처로 삼았을 것인가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셋째, 의운화상의 존재이다. 기록에 따라 의운화상진흥왕 때 국사라고 한 경우도 있고, 법사라고 한 경우도 있다. 의운화상을 백제의 승려로 보기도 하나 원래 신라의 승려로 선운산에 들어와 불도를 편 것이며, 뒤에 그의 대덕을 칭송하는 의미로 뒤에 국사로 존칭하고 국사봉의 이름까지 정하게 되었으나, 실상 의운화상은 백제의 왕사도 아니고 신라의 왕사도 아니다.

「대참사 사적기」에 진흥왕의운화상이 연관된 듯이 보이는 내용도 실려 있으나 두 사람을 같은 시대에 활동한 인물로 확정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오히려 당 태종 정관 연간의 대참사 창건 시 화주(化主)가 비구 의운화상으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그의 활동 시기는 백제 말에서 통일신라 초에 걸쳐지며, 진흥왕보다 후대의 인물일 가능성이 크다 하겠다.

[묘소]

선운사참당암에 비가 남아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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