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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800778
한자 黃胤錫
영어음역 Hwang Yunseok
이칭/별칭 영수(永叟),이재(頤齋),실재(實齋),서명산인(西溟散人),운포주인(雲浦主人),산뢰노인(山雷老人),월송외사(越松外史)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전라북도 고창군 성내면 조동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박노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유학자|문신
출신지 전라북도 고창군 성내면 조동리
성별
생년 1729년연표보기
몰년 1791년연표보기
본관 평해
대표관직 전의현감

[정의]

조선 후기 고창 출신의 유학자이자 문신.

[가계]

본관은 평해(平海). 자는 영수(永叟), 호는 이재(頤齋)·실재(實齋)·서명산인(西溟散人)·운포주인(雲浦主人)·산뢰노인(山雷老人)·월송외사(越松外史). 평해군 황숙경(黃淑卿)의 후손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취은(醉隱) 황세기(黃世基)이고, 할아버지는 산촌(山邨) 황재만(黃載萬)이며, 아버지는 만은(晩隱) 황전(黃廛)이다.

[활동사항]

황윤석(黃胤錫)은 5세 때 할머니 김씨에게서 글자를 익히고, 이듬해에 시를 배웠다. 14세 때인 1741년(영조 17) 백시명(白時明)과 백시덕(白時德)의 문하에서 수학했는데, 이때부터 수학과 문자학에 관심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745년(영조 19) 수학에 관한 저술인 『이수신편(理藪新編)』을 쓰기 시작하였다.

1745년(영조 21) 여호(黎湖) 박필주(朴弼周)에게 사사하려 했으나 의견이 맞지 않아 그만 두었다. 이 무렵 정읍 이언복(李彦福)의 집에서 자명종(自鳴鐘)을 보았는데 이를 주제로 「윤종기(輪鐘記)」를 쓰게 되었다. 1748년(영조 24) 남원의 처가에 머물면서 정후(丁垕)와 함께 사람의 성(性)이 동물의 성과 같은가, 다른가에 대한 논란인 ‘호락심성동이(湖洛心性同異)’에 관하여 토론했다.

1756년(영조 32) 당시의 거유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의 문하에 왕래하며 학문의 규모와 심성의 변을 질문했고, 1758년(영조 34) 병계(屛溪) 윤봉구(尹鳳九)의 문하에 들어가 백가서를 통독했다. 다음 해 사마시에 합격하고, 순창의 백수(白水) 양응수(楊應秀)를 만났으며, 선운사도솔암(兜率庵)과 백양사의 백련암(白蓮庵) 등에서 『주역(周易)』 등을 읽고, 성리학 연구에 더욱 정진했다. 1764년(영조 40) 전주에서 목산(木山) 이기경(李基敬)을 만나 ‘호락심성이기변(湖洛心性理氣辨)’을 논하고, 다시 김원행을 찾아가 『대학(大學)』 강의를 받으며 마침 장성에 유배되어 있는 정경순(鄭景淳)을 찾아가 학문을 논했다.

1765년(영조 41) 김수(金璲)와 학문을 논하고, 안형옥(安衡玉)과 ‘심성이기설(心性理氣說)을 논했으며, 양응수에게 정약용(丁若鏞)의 저서인 『경세유표(經世遺表)』에 대한 의문점을 묻고 예절에 관한 글을 지었다. 1766년(영조 42) 실학자인 서명응(徐命膺)과 역상(易象), 범수(範數), 자서(字書) 등을 논했다. 그 해 장릉참봉에 제수되고, 김원행의 부탁으로 김민적(金民積)의 『혼벽당유고(混闢堂遺稿)』를 교정하였다. 1767년 다시 정경순을 찾아가 당시의 민생을 구제하는 데 대한 구시책(求時策)을 의논하고, 천문과 역법에 대해 논했다.

1768년 윤창정(尹昌鼎)과 함께 당시 전래된 서양의 마테오 리치(Matteo Ricci)의 ‘지원설(地圓說)’을 논했고, 1769년 김용겸(金用謙)과 함께 『중용(中庸)』의 오묘한 이치와 역범(易範)·율력(律曆)·전병(田兵)·관직·산수·음악 등에 대하여 연구하였다.

1770년 김용겸·홍계희(洪啓禧) 등과 『주자대전(朱子大全)』을 교정했고, 영조의 명을 받아 여암(旅庵) 신경준(申景濬)과 경복궁 근정전에 입시하여 예조판서 한광회(韓光會)와 함께 어첩을 작성하여 봉안했다. 이때 외세의 침략에 대비해야 할 방법을 논한 「방비책」을 지었다.

1774년(영조 50) 기언정(奇彦鼎)과 백성을 구제하는 ‘구시책(救時策)’을 논하고, 심정진(沈定鎭)과 경의(經義)·복서(卜筮)·율력·성위(星緯)·병진(兵陣) 등을 논했으며, 염영서(廉永瑞)를 시켜 자명종의 일종인 윤종(輪鐘)을 제작했다. 1775년(영조 51)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을 수정하고, 그 예를 인용하여 「의증수동국여지승람예인(擬增修東國輿地勝覽例引)」을 지었다. 또한, 도량형을 고증하여 「곡석설(斛石說)」을 지었다. 1776년(영조 52) 정월에 익위사익찬(翊衛司翊贊)으로 임명되었으나 곧 그만두었다.

1778년(정조 2) ‘인물성동이’의 시비가 되었던 호론과 낙론의 견해를 종합하여 「호락이학시말기(湖洛二學始末記)」를 지었다. 1779년(정조 3) 김용겸과 『주서유집(朱書遺集)』을 교정하고, 그 해 목천현감에 제수되었다. 1781년(정조 5) 면앙정(俛仰亭) 송순(宋純)의 행장을 지었고, 1785년(정조 9) 불우헌(不憂軒) 정극인(丁克仁)의 행장을 지었다.

1786년(정조 10) 전생서주부(典牲署主簿)가 되고, 곧 전의현감에 임명되었다. 이즈음 역대 왕의 선원전(璿源殿)에 관한 「본조조종진전사실변(本朝祖宗眞殿事實辨)」을 지었으며, 『문헌비고(文獻備考)』와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영정이 안치된 경기전사실변을 지었다. 1788년(정조 12) 복식 제도인 「부인회두제도설(婦人繪頭制度說)」을 지었고, 1790년(정조 14) 「소자황극경세서사상체용성음괘수도해(邵子皇極經世書四相體用聲音卦數圖解)」를 지었다. 1791년(정조 15) 돈의 무게에 관한 「전화경중설(錢貨輕重說)」을 짓고, 4월 15일 ‘수필 일기’를 마지막으로 쓰고 세상을 떠났다. 이 밖에도 집필 연대를 알 수 없는 중국어 연구 글인 「화음방언자의해자모변(華音方言字義解字母辯)」 등을 남겼다.

[학문과 사상]

황윤석의 사상적 특징은 다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모든 학문은 경전(經典)을 기반으로 해야 하다는 고증학적 태도를 나타낸 것이다. 둘째, 학자가 학문을 할 때에는 어느 것이나 널리 알아야 한다는 점을 주장하여 소위 박학적 학문 방법을 취하고 있다. 셋째, 배워서 알고 있는 것은 실제 생활에 응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학문적 특징은 조선 근대의 실학적 학문 태도와 명백히 일치하고 있다. 황윤석의 이러한 사상적 특징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먼저 과거의 유학자들의 학문 방법은 한결같이 정주학(程朱學)의 ‘심성이기설’에만 집착하고 있는 데 반하여 그의 학문 방법은 경전의 올바른 이해를 기초로 하고 있다. 즉, 그는 ‘학(學)’이란 유교 경전인 사서오경(四書五經)을 읽는 데 그치지 않고, 그 학문의 사상과 내용 속에 담겨 있는 성현의 가르침을 깨닫고, 그 가르침이 올바로 이해되며 전래되었는가를 명확히 깨달아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경전의 탐독에 그치지 않고 이를 고증하여 믿을 수 있는 학문인가를 탐구하였다. 그의 문집 가운데 고증이나 의문에 대한 저술이 많은 것은 이와 같은 그의 학문적 태도에 연유했다고 할 수 있다.

둘째, 그는 조선 후기 실학자들이 그러했듯이 박학하는 데 충실하고 있다. 그는 경전 이외에 역사, 천문, 지리, 인물, 풍토, 언어, 습관, 의례, 상수, 복서, 율역, 법형제도, 사, 어, 서, 수 등에 관해서도 모두 탐구하였고, 그 결과를 저술을 남기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그의 학문 방법이 박학에 충실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실제 생활에 유익하게 이용하는 데 힘썼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셋째, 황윤석은 이론적 지식을 실천에 옮기고자 자신이 배우고 연구한 것을 모두 기억하고 또 저술했다. 그리고 황윤석은 서구에서 전래된 새로운 문명과 과학 기술에도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 그리하여 그는 염영서에게 자명종을 제작시켰고, 산학과 성음, 음악에 이르기까지 탁월한 연구와 기록을 남겼다. 이러한 사실은 배우고 익힌 지식을 실생활에 적용하려는 그의 학문적 태도에서 연유된 것임을 말해 준다. 이와 같이 그는 전형적인 실학자로서 실학적 학문과 학설에 민감했지만, 다른 실학자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학문은 저술에 그치고 세상에 실제로 응용되지 못한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이것은 당시 사회의 정책적 테두리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어쩔 수 없는 한계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황윤석은 실로 다방면에 걸쳐 많은 저서를 남기고 있다. 그는 유교 경전의 본격적인 연구와 도덕적 인격의 수양을 비롯하여 정치, 교육, 음양, 이기, 성명, 상수, 복서, 시문, 계잠, 역사, 천문 지리, 인물, 풍토, 언어, 관습, 의례, 법전, 제도, 수학, 의약, 풍수, 농공, 병법, 술수, 선, 불, 제자백가 등에 이르기까지 섭렵하지 않은 것이 없고 저술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의 이와 같은 저술들은 호남 지역은 물론 전국의 실학자들에게 선구적인 위치를 확보한 것이다. 황윤석의 학문과 사상이 당시의 학계 또는 실학사상에 끼친 영향은 그의 연보에서 대강 짐작하게 되지만, 그는 호남을 비롯한 각 지역의 인물들과 널리 교유하며 강학하고 토론한 자취로 보아 서로가 지대한 영향을 주고받았음을 알 수 있다.

황윤석은 남원의 정후와 전주의 이기경(李基慶)과는 성리학을 논의하였고, 김용겸홍계희, 그리고 심정진 등과는 경전을 토론하였으며, 서명응·위백규(魏伯珪)·이언복·윤창정 등과는 실학으로 교유하였다. 황윤석이 같은 스승인 윤병구 문하에서 공부했던 동문 중 실학사상에서 유다른 영향을 주고받은 사람은 위백규라 하겠다. 황윤석위백규는 호남의 대표적인 실학자로 나이는 황윤석이 두 살 위였으나 서로가 흉금을 털어놓고 학문을 토론하면서 성장했던 사이이다. 이 밖에도 장성부사로 와 있던 정경순은 역률·경제 등에 관한 지식을 교환하여 황윤석을 계방(桂坊)[익위사]에 추천하기도 했고, 동복에 거주하던 나경적·나경훈·안처인과 나주에 거주하는 염영서와도 많은 교류를 하였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 『이재유고(頤齋遺稿)』·『이재속고(頤齋續稿)』·『이수신편(理藪新編)』·『자지록(恣知錄)』 등이 있다. 이 중 『이재유고』에 「자모변(字母辨)」·「화음방언자의해(華音方言字義解)」 등이 있어 국어학사의 연구 대상이 되며, 운학에 대한 연구는 『이수신편』에 실려 있다.

[상훈과 추모]

전북대학교는 2007년 7월 13일 이재(頤齋) 황윤석의 호를 딴 ‘이재연구소’를 개소하고 호남 실학의 학문과 사상을 연구해 나가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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