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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800748
한자 金聲振
영어음역 Gim Seongjin
이칭/별칭 원지(遠之),국재(菊齋)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전라북도 고창군 대산면 중산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기화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의병
출신지 전라북도 고창군 대산면 중산리
성별
생년 1564년연표보기
몰년 1597년연표보기
본관 광산
대표관직 문소전참봉

[정의]

조선 후기 고창 출신의 의병.

[가계]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원지(遠之), 호는 국재(菊齋). 집현전 학자 김양원(金暘元)이 증조할아버지로, 아버지는 참봉 김한련(金漢璉)이다.

[활동사항]

김성진(金聲振)은 어려서부터 강개한 지기(志氣)가 넘치고 효행이 지극했는데, 아버지가 병환이 위급하자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입에 넣어 주었고, 몰래 허벅지살을 떼어내 탕으로 달여 먹임으로써 주변의 찬사가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아버지가 죽자 3년간 정성껏 시묘를 살았다.

중종 때의 명필노계(蘆溪) 김경희(金景熹)의 문인으로 학문의 심취를 깨달았다. 29세에 임진왜란을 당한 그는 “국사가 어렵게 되어 군부(君父)가 몽진하는 마당에 신자(臣子)로서 어찌 안일을 도모하리오.” 하며 삼종형 김홍우(金弘宇)와 좌랑 김민재가 장성 남문 밖에 의병청을 설치함에 함께하기로 다짐하였다. 그리고 죽음을 각오할 동지 185명과 군량미 68석, 마태(馬太) 13석, 창검 98자루 및 10여 명의 가동(家僮)을 인솔하였다.

이에 장성 의병장 김경수(金景壽)김성진을 보고 “그대는 혈기 넘치는 젊은 서생으로 『육도삼략(六韜三略)』에 능통하니 우리 함께 힘을 합쳐 적을 무찌르자.”고 말하며 혈맹을 맺었다. 김성진은 의병장 김제민과 더불어 직산과 용인 등지를 누비며 적 수십 명을 참살하였으나, 명나라 병부우시랑 송응창(宋應昌)이 강화(講和)를 도모한다는 소식을 듣고 통분 속에 귀향하였다.

이후 김성진은 노모를 지성으로 모셨는데, 이에 조정에서 문소전참봉(文昭殿參奉)에 제수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그리고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다시 의병을 일으켜 남문 창의소로 달려가 군량 운송 책임을 맡는 운량관(運糧官)의 소임을 다하였다. 당시 그는 김신남(金信男)과 함께 수하 의병들을 인솔하여 경기도 안성과 소사까지 진출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으나, 중과부적으로 적에게 포위되어 8월 27일 34세를 일기로 장렬히 전사하였다.

[묘소]

묘소는 전라북도 고창군 성송면 판정리에 있는데, 시신을 못 찾아 옷과 신발만 묻은 것이다.

[상훈과 추모]

전라북도 고창군 대산면 중산리에 유허비각(遺墟碑閣)이 있다. 전라남도 장성 오산사(鰲山祠)에서 향사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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