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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800710
한자 柳相浚
영어음역 Yu Sangjun
이칭/별칭 백명(伯明),경당(敬堂)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전라북도 고창군 고수면 봉산리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이기화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유학자
출신지 전라북도 고창군 고수면 봉산리
성별
생년 1853년연표보기
몰년 1895년연표보기
본관 고흥

[정의]

개항기 고창 출신의 유학자.

[개설]

본관은 고흥(高興)이며, 자는 백명(伯明), 호는 경당(敬堂)이다. 아버지는 계은(溪隱) 유낙연(柳樂淵)이다. 1853년 지금의 전라북도 고창군 고수면 봉산리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 유진룡(柳鎭龍)이 전라남도 영광군 불갑면에서 살다가 봉산리로 이거했다고 전한다.

[활동사항]

유상준(柳相浚)은 타고난 성품이 순박하고 인정이 많으며 효성이 지극했다고 한다. 여섯 살 때인 1858년(철종 9)부터 가학(家學)을 익히면서 문리(文理)를 얻어 문장에 능했다. 1874년(고종 11) 아버지의 뜻에 따라 충청남도 공주의 상로리에 사는 전재(全齋) 임헌회(任憲晦)의 문하에 입문하여 학문과 철학을 수업하였다. 이듬해 스승의 허락을 받아 주자(朱子)의 영정(影幀)을 참배하고 시를 지었으며, 그 해 「망향정사실기(望鄕亭事實記)」를 지었다.

1876년(고종 13) 스승 임헌회가 세상을 떠나자 장례를 마치고 고향에 돌아와 매년 스승의 기일이면 제사를 지내며 심상(心喪)[상복(喪服)은 입지 않되 상제(喪制)와 같은 마음으로 근신(謹身)하는 일] 3년을 지켜 냈다. 또한 매일 아침 주자의 영정에 배알하고 난 후 독서하며 글을 짓는 습성을 생활화하니 향리가 모두 본받았다. 31세 때인 1883년(고종 20) 스승 임헌회의 문집을 간행하여 행의를 바르게 지키는 선비다운 면모를 보였다. 43세 때인 1895년(고종 32) 아버지를 두고 죽는 것은 불효라고 통곡하면서 죽었다고 한다.

유상준은 살아생전에 혼정신성(昏定晨省)[아침저녁으로 부모의 안부를 살피는 것]을 철저하게 실천한 효자였으며, 사서(史書)를 깊이 있게 공부했는데, 특히 『소학(小學)』과 『근사록(近思錄)』 등을 손에서 놓지 않으며, 평생토록 청나라 연호를 쓰지 않았다. 평상시에 극기(克己)로 분노를 다스리고 명(銘)을 써 붙여 놓고 엄격하게 자신을 다스렸으며, 시문(詩文) 짓기를 삼가였으며, 가례 법도를 지키고 후진 양성에 정성을 다하였다.

타고난 기상은 약한 편이었으나 꾸준히 의연한 기상을 스스로 길러 냈으며, 향교에서 여러 차례 그의 학덕을 천거하려 했으나 단호히 거절하였다. 부모의 장례를 치를 때도 가풍을 지켜, 문상 온 조문객들에게 술과 고기를 대접하지 않고 식상(食床)을 마주한 채 옛 가르침을 담론으로 나누는 미덕을 지켜 냈다. 송병선(宋秉璿)·전우(田愚) 등과 교류가 깊었다. 묘소는 전라북도 고창군 고수면 봉산리에 있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 『경당유고(敬堂遺稿)』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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