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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호우선봉일기』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800642
한자 兩湖右先鋒日記
영어음역 Yanghouseonbong-ilgi
영어의미역 Garrison's Diary
분야 역사/근현대,문화유산/기록 유산
유형 문헌/단행본
지역 전라북도 고창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신순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군영 일지
관련인물 전봉준|이두황|김개남
저자 이두황
저술연도/일시 1894년 9월~1895년 2월 18일연표보기
간행연도/일시 1996년연표보기
책수 4책
사용활자 금속활자본
표제 右先鋒日記
소장처 왕실도서관 장서각|고려대학교 도서관
소장처 주소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운중동 50[하오개로 323]|서울특별시 성북구 안암동5가 1-2[안암로 145]

[정의]

개항기 고창 지역에서 전개됐던 갑오농민운동군을 진압한 관군 장위영(壯衛營)에서 남긴 군영 일지.

[개설]

1894년 9월 동학 농민군이 삼남 지방은 물론이며 경기도 안성(安城)과 죽산(竹山)에서까지 기포하자 조선 정부는 9월 10일 1882년 임오군란 후 무과에 급제한 이두황(李斗璜)[1858~1916]을 죽산부사 겸 장위영 영관으로 임명해 동학 농민군을 진압하게 하였다. 이에 이두황은 죽산부사겸장위영의 우선봉으로서, 좌선봉을 맡은 안성군수이자 경리청령관(經理廳領官) 성하영(成夏泳)과 함께 각각의 군대를 이끌고 남진하였다.

이두황은 동학군 배접의 제2차 봉기를 기습하였고, 김개남(金開男)의 동학군을 격파하여 북상하던 전봉준(全琫準)의 군대를 저지하였다. 이외에도 수많은 동학군을 살육하고 전주에 집결한 동학군을 격퇴시켰다. 그는 또한 이후 장위영의 참령관으로서 일본군에 파견되어 정찰 수행과 정보를 제공하고, 1895년에는 훈련대장으로 민비의 시해에 가담하기도 하였다. 이후 체포령이 내려지자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1907년 특사가 되어 귀국했고, 이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배려로 중추원부찬의와 전라북도관찰사, 전라북도장관 및 여러 일본 사회단체의 지부장 등을 역임하여 여러 차례 서위와 상금을 받았다.

[편찬/발간 경위]

조선 정부는 1894년 갑오년 농민혁명군을 진압하기 위해 호서와 호남 지역으로 장위영을 파견하였는데, 『양호우선봉일기(兩湖右先鋒日記)』은 우선봉령관인 이두황의 우선봉 부대가 9월 10일부터 이두황이 서울로 귀환해서 인신(印信)을 반납한 이듬해 2월 18일까지 매일의 상황을 간략히 기록하고 있다.

[서지적 상황]

왕실도서관 장서각외에 고려대학교 도서관 소장본이 있다. 영인본은 역사문제연구소와 동학농민전쟁백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에서 편찬한 『동학농민전쟁사료총서(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에 수록되어 있다.

[형태]

4책의 금속활자본이다. 표제는 ‘우선봉일기(右先鋒日記)’이다. 계선 형태는 이어진 계선이다. 광곽은 사주단변(四周單邊)이다. 행수는 11행, 한 행의 자수는 22자이다. 판심에는 위에만 상향의 검은색 어미(魚尾)가 있다.

[구성/내용]

권의 구분 없이 날짜순으로 기술되어 있다. 9월 10일 의정부에서 “비도(匪徒)가 기전(畿甸), 죽산, 안성 등지까지 올라오니 병사를 차출하여 이를 막으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에 이두황과 성하영이 상기초포사(相機剿捕事)로 파견되었다는 것으로 시작된다.

『양호우선봉일기』는 그 지휘관이 친일 매국노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공정하게 진압을 지휘했다는 것을 말하는 부분이 눈에 띈다. 예를 들면, 9월 21일에 적도의 세력이 용인에까지 이르렀을 때 일본 병사 30명과 이희두(李熙斗)·김광수(金光洙)·강원로(姜元魯) 3명을 만났는데, 이 중 이희두가 동도 3명을 잡아 엄히 형을 주려 하자, 이를 심문하여 죄가 없다는 것을 밝혔고, 이에 그들을 풀어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은 이두황의 군대가 죄 없는 농민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지 않았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러나 이러한 단편적인 사실만으로 일제와 결탁한 이두황의 관군이 조선 민중인 동학군을 잔인하게 살육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엄폐할 수는 없다. 『양호우선봉일기』는 근본적으로 군영 일기에 해당되므로, 군대의 활동 상황에 관한 사실 관계를 6하 원칙에 따라 간략하고 평이하게 기술하고 있다. 따라서 이 군대가 어떠한 성격을 가졌고, 동학군은 당시 정세에서 어떤 지위를 차지하는지에 대해서는 서술할 수 없었을 것이다.

기록들은 모두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했고, 동도를 몇 명 잡거나 죽였으며, 포획한 것이 무엇인지 등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예를 들면, 9월 22일에는 어제 잡은 동학군 이용익·정용전·이주영·이삼준 등을 심문했고, 이들이 동학에 철저히 물들었다는 이유로 마을 앞 큰길에서 공개적으로 총살하여 사람들을 경계토록 했다는 기록이 있다.

『양호우선봉일기』는 이와 같이 군대의 활동에 대해 단순한 사실 관계를 기록한 것이다. 그러나 『양호우선봉일기』의 기록에 따르면, 이두황의 군대는 동학군을 단순한 도적의 무리와 동일시했으며, 이들이 인의도덕(仁義道德)을 파괴하고 양민의 곡식과 재물 등을 약탈한다고 간주하여 처형했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양호우선봉일기』는 우선봉진의 이동·효유·진압·처벌·전투·다른 관군 및 일본군과의 합동 작전·중앙 정부 및 지방관과의 연락·군수품 조달·휘하 병정의 명단 등 제2차 동학 농민 전쟁에 관한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두황의 부대는 목천 세성산 전투에서 크게 승리한 것을 비롯해서 해미 전투·서산 전투·논산 전투를 치렀다. 그리고 우금치 전투에서 패퇴한 동학 농민군을 추격해서 전라도로 넘어가 남원에서 승리를 거둔 다음 곡성·구례·광양·순천·보성·장흥 등 전라남도 각 군·현을 순행하였다.

제1책에서 주목되는 내용은 충주와 진천 일대에서 활동하던 동학의 남접과 북접의 관계, 북접의 기포 경과, 맹영재 등 민보군과 동학 농민군의 충돌에 관한 것으로 다른 자료에서 볼 수 없는 중요한 기술이다. 그렇지만 9월 24일조에 실린 탐문 보고서에는 남접의 지도자로 이름 높은 서장옥(徐璋玉)이 허문숙과 함께 유학당(幼學黨)이 되어 동학당 신재련과 대치하고 있다고 되어 있지만, 이는 잘못된 기록으로 보인다.

제2책은 우금치 전투 이후 충청남도 일대의 전투 상황을, 제3책과 제4책은 전라도로 퇴각해서 분산되어 버린 동학 농민군의 진압 과정을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유학자로 이름 높은 이기(李沂)가 토벌군을 조직해서 구례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사실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양호우선봉일기』는 같은 해 11월 30일까지 이어지고, 마지막에 「전장위영출진군안(前壯衛營出陣軍案)」이 나온다. 이것은 장위영의 군대가 출진할 때 소속되었던 군인들의 명부다. 여기에는 우선봉 이두황을 비롯해서 참령 원세록, 대관 김진풍 외 3명, 별군관 이겸래 외 3명, 서기 최태현·윤구영·윤현영·윤광영 등의 이름이 수록되어 있고, 좌 4개 소대, 중 4개 소대, 우 4개 소대[1소대 60여 명으로 구성]로 구성된 약 700여 명의 부대원 전원의 명단을 수록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양호우선봉일기』는 갑오동학운동의 진압군이었던 장위영의 군영 일지로서, 당시 관군이 동학군을 진압하는 과정에 대해 그 세부적인 사실들을 알 수 있게 하는 자료이다. 또한 장위영의 지휘관이 매국노인 이두황이라는 점에서 흥미를 주는 자료로서, 당시 진압군이 동학군을 어떻게 보았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들을 진압하였는지를 생생하게 보여 준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있다. 곧 관군 측에서 기록한 토벌 일기로 어느 정도 사실성이 인정되며, 고창 지역 농민군 인사와 전투에 관한 상세 내용이 실려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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