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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800497
한자 現代
영어음역 Hyeondae
영어의미역 Modern History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북도 고창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신순철

[정의]

1945년 해방 이후 현재까지의 전라북도 고창 지역 역사.

[개설]

일제의 무조건 항복과 패망으로 1910년에 강탈당한 국가의 주권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가 왔으나,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이남은 미군이, 이북은 소련군이 진입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완전한 주권 회복은 힘들게 되었다. 이후 1948년 8월과 9월 남북에서 별도의 정치 세력들이 각각의 단독 정부를 수립함으로써 결국 한민족은 분단의 역사를 걷게 되었다.

[국회의원 선거]

2차 세계대전 전후 처리 문제를 협의한 미·영·소의 모스크바삼상회의의 결정에 따라 1946년과 1947년 2차에 걸쳐 미소공동위원회가 소집되었지만 한국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결국 UN의 결정에 의해 단독 정부 수립을 위한 남한 지역만의 총선거가 결정되었다. 이에 1948년 5월 10일 김구를 주축으로 하는 상해 임시 정부 세력 대부분이 불참한 가운데 남한에서만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고창군의 국회의원 선거는 선거구의 크기에 따라 국회의원 2인을 선출하도록 되어 있었다. 따라서 갑구[고수면·성송면·무장면·대산면·공음면·상하면]와 을구[아산면·해리면·심원면·부안면·흥덕면·성내면·신림면]로 나누어 실시하였다. 제1대 국회의원선거에서는 갑구에서 무소속의 김영동이, 을구에서 한민당의 백관수가 당선되었다. 그러나 백관수는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자택에서 납북되었다.

제헌 의원의 임기가 2년으로 끝나자 1950년 5월 30일 제2대 국회 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당시 여당의 지지가 흔들리자 이승만은 1952년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내놓았고, 국회가 이를 부결시키자 여당과 야당의 대립은 첨예화되었다. 고창군에서의 선거 결과 갑구에서는 김수학이, 을구에서는 신용욱이 당선되었다.

제10대까지 고창 지역에서 당선되어 활동한 국회 의원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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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의 대립]

정부 수립 이전까지 고창 지역은 좌우 계열이 충돌하는 정치적 소용돌이를 겪었다. 따라서 좌익과 우익 간의 이데올로기와 관련한 사건으로 희생당한 양민들의 진상 조사가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곧 대표적인 사건이 고창11사단사건과 고창월림사건이다.

고창11사단사건은 6·25전쟁 당시 국군 11사단장의 견벽청야(堅壁淸野) 작전에 따라 전라북도 고창 지역 공비 토벌 작전을 수행하던 국군에 의해 인근 지역 피난민과 마을 주민 등 최소 273명이 희생된 사건이다. 사건의 발생 시기가 국민의 기본권이 제한되는 전시 계엄하였고, 국군의 수복 과정이라는 극히 혼란한 상황이었으나 국군이 적법한 절차 없이 비무장, 무저항의 민간인을 집단 살해한 것은 인도주의에 반한 야만적 행위로서, 헌법에서 보장한 생명권을 침해하고 재판 받을 권리를 침해한 것이다. 또한 국가가 국민의 생명을 빼앗거나 인신을 구속하는 처벌을 할 경우 합당한 이유와 적법한 절차에 따라야 하나 사건의 가해 부대는 이를 이행하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고창월림사건은 인민군이 월림 지역을 점령한 1950년 10월께 마을의 주도권을 장악한 천씨 일가(一家)가 평소 감정이 좋지 않았던 중대장 김용식 일가 53명을 살해하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중대장으로 공비를 토벌 중이던 김용식은 이 소식을 듣고, 자신의 가족을 살해한 가담자와 부역 행위자로 지목된 월림 지역 주민 95명을 보복·사살하였다. 곧 6·25전쟁 시기 이데올로기 갈등이 있었던 고창 월림 지역에서 경찰 전투 대대 중대장이 자신의 일가족이 살해당한 것에 대한 개인적인 복수심에서 사건을 저질렀던 것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6·25전쟁 당시와 그 이후에도 고창 지역은 좌우익 간의 갈등 잔재가 남아 상당히 불안정하였다.

[미래 희망 도시 고창]

전쟁이 끝나면서 고창 지역 역시 점차 행정 기반을 회복하며 정치·경제·사회적으로 새로운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경제적으로는 1·2·3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이 수립됨에 따라 농업의 기초를 닦아 급속한 변화가 이루어졌다. 특히 농촌에서는 농업 구조의 개조와 쌀의 획기적인 증산, 대단위 야산 개발 사업, 새마을 운동이 시작되었다. 한편 이농으로 노동력 감소 현상이 나타나자 1980년대에 이르러서는 이의 해결을 위해 「농업기계화촉진법」을 제정되었다. 이후 1978년 고창군의 농지는 300㎢가 넘었으며 1985년도 미곡 생산량은 10만 7770톤에 달하였다. 이밖에 1985년도 어업 가구 수는 1,405호였다.

행정적으로는 고창면이 고창읍으로 승격되어 고창군의 중심지로 변모하게 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면 단위별로 교육 시설도 정비되었다. 1950년 이후 해리중학교·대성중학교·고창여자고등학교·창북고등학교·신림중학교·아산중학교·상하중학교·성내중학교·공음중학교·심원중학교·해리고등학교 등이 설립되어 교육의 중추적 기능을 담당하였다. 1970년대 새마을 운동이 시작되면서 마을 정비가 이루어졌으며, 내 고장 가꾸기라는 지엽 단위에서 벗어나 향토사를 정리하고 향토애를 갖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개인 문집과 마을지 등이 발간되었다. 대표적으로 『모양지』·『고창향교지』·『흥덕현지』·『송사윤강록』·『송사유림연원록』·『흥성문헌록』·『고창삼강록』·『흥덕향교지』 등이 간행되어 명실상부 역사와 전통이 숨 쉬는 미래 희망 도시 고창군을 만들어 나가고 있다.

경제 부문에서는 ‘활력 있고 기업하기 좋은 미래 경제 도시 건설’을 목표로 5개 분야에서 군정을 추진하고 있다. 기업하기 좋은 고창을 만들기 위해 일반 지방 산업 단지 조성[2008~2012년] 계획을 세워 흥덕산업단지[315.122㎡]를 조성하여 총 11개 기업이 입주하여 1,024명의 고용 인원을 창출하였고, 투자 유치 진흥 기금 50억 원, 중소기업 지원금 9억 원을 조성하고 기업인과 간담회를 실시하고 있다. 고부가가치 골프 산업 클러스터 조성을 위하여 성송면·대산면·무장면 일대에 총 사업비 1조 3000억 원[민자]을 조성하여 5,000가구 규모의 주택 단지, 실버 및 의료 케어 단지, 사업 단지, 골프장, 연수원 등을 조성하고 있다. 신재생 에너지 산업으로 저탄소 녹색 성장을 이루고자 상하면과 해리면 명사십리 해안에 고창 해상풍력발전단지 조성, 신바람 에너지 과학관, 축산 분뇨 바이오 가스 열병합 발전 시설, 에너지 절감 및 신재생 에너지 보급 확대, 고창군 천연가스 공급, 관내 태양광 발전소 허가 및 사업 개시 등이 이루어지고 있다.

[참고문헌]
  • 『고창군지』 (고창군지편찬위원회, 2009)
  • 올바른 과거청산을 위한 범국민위원회(http://www.ktruth.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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