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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800464
한자 壬辰倭亂
영어음역 Imjin Waeran
영어의미역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북도 고창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주명준

[정의]

1592년부터 1598년까지 왜군의 조선 침략으로 일어난 전쟁.

[개설]

임진왜란은 1592년(선조 25)에서 1598년(선조 31)까지 2차에 걸쳐서 조선을 침략한 일본과의 전쟁이다. 제1차 침략이 임진년에 일어났으므로 임진왜란이라 부르며, 2차 침략이 정유년에 일어났으므로 정유재란이라 하는데, 이를 통칭하여 임진왜란이라고 한다. 이때에 조국을 위기로부터 구하고자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고창 지역에서도 의병이 일어나 각지에서 왜군과 맞서 싸웠다.

[배경]

임진왜란이 일어날 무렵 조선의 정세는 정치적으로는 연산군(燕山君) 이후 명종에 이르는 4대 사화와 훈구 세력·사림 세력 간의 정쟁으로 인한 중앙 정계의 혼란으로 정치의 정상적인 운영이 어려운 실정이었다. 그리고 군사적으로는 조선 초기 군국기무(軍國機務)를 장악하는 비변사라는 합의 기관을 설치하여 빈번한 외침에 대비해 왔으나 이 또한 정상적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이이(李珥)[1536~1584]가 남왜북호(南倭北胡)의 침입에 대처하기 위하여 10만 양병설을 주장하며 국방의 중요성을 역설했으나 오히려 배척당하는 실정이었다.

이와 더불어 일본에서는 새로운 형세가 전개되고 있었다. 즉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일본의 전국 시대를 종식시키는 국내 통일에 성공한 후 각 제후들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대륙 침략을 계획하면서 일차적으로 조선을 침략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당시 고창 지역도 이러한 국제 정세로부터 벗어나기 어려울 수밖에 없는 지역의 하나가 되었다.

[전쟁 발발]

도요토미는 조선과의 교섭이 결렬되자 바로 원정군을 편성하여 조선을 침공하도록 하였다. 고니시 유키나가, 가토오 키요마사, 쿠로다 나카마사 등에게 15만 8700명을 주어서 부산과 동래에 침공해 왔다.

급보를 접한 조정에서는 급히 대책을 논의한 끝에 임시변통으로 다음의 인물들을 선발하여 적의 북침에 대비하게 하였다. 즉, 이일(李鎰)[1538~1601]을 순변사로 삼아 조령·충주 방면의 중로를, 성응길(成應吉)을 좌방어사에 임명하여 죽령·충주 방면의 좌로를, 조경(趙儆)[1541~1609]을 우방어사로 삼아 추풍령·청주·죽산 방면의 서로를 방어하도록 하였다. 또한 신립을 도순변사로 삼아 이일의 뒤를 이어 떠나게 하고, 좌의정 유성룡(柳成龍)[1542~1607]을 도체찰사로 삼아 제장을 검독(檢督)하게 하였다.

잘 훈련되고 조총이라는 신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북상하여 보름 만에 서울을 함락하고 선조(宣祖)는 평양을 거쳐 의주에까지 몽진하였다.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1545~1598] 장군을 제외한 전군이 무력하게 일본군에게 패배하였다.

[고창 의병]

1. 고창현김홍우

고창현광산김씨김홍우(金弘宇)를 중심으로 두 아우 김광우, 김덕우와 그 일가인 김성진, 김기수, 김란, 그리고 성홍도, 박안도, 김경우, 서연, 조여일 등 11인이 장성 사람 김경수, 기효간, 윤진 등과 함께 장성 남문에 의병청을 설치하고 의병과 군량을 모아 행재소와 타 도 의병소에 지원하는 등 전공을 세웠다. 특히 김홍우는 경기도 소사에서 수많은 일본군을 죽이는 전과를 올려 선무원종공신에 봉해졌다.

2. 무장현김축

무장현김해김씨김축(金軸)김기남, 김기경, 김우남 세 아들과, 아우 김헌, 조카 김두남, 김지남 등 근친을 합한 25명과 가동과 마을 사람들을 창의하여 권율(權慄)[1537~1599] 장군의 막하에 들어가 이치 전투, 웅치 전투에 참전하였다. 김축은 후에 김천일(金千鎰)[1537~1593]과 동맹하고 최경회, 황진, 고종후 등과 함께 진주 혈전에 참전하여 큰 공을 세웠으나 전쟁에 패하여 김축의 부자와 숙질들은 모두 전사하였다. 그때 김축의 나이는 80세이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김축의 아내 반남박씨를 비롯해서 김헌, 김기남, 김두남, 김세근 등의 아내 5명이 남편을 따라 자결하였다. 조정은 김축 일가 25명과 5명의 아내들에게 어사각을 내리고 『선무원종공신록(宣武原從功臣錄)』에 서훈하여 『단서철권(丹書鐵券)』을 내렸다.

3. 흥덕채홍국

채홍국(蔡弘國)흥덕에서 창의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채홍국은 동년 9월 창의를 부르짖으니 이에 호응한 90여 명의 의사들이 흥덕현 북면의 남당에 모여 삽혈동맹, 즉 목숨을 바쳐 싸울 것을 피로써 맹세하여 채홍국을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의병소를 설치하였다. 남당 의병은 동년 10월 6일 법성진 군량 4백 석을 내게 하여 3백 석을 의곡장 기효증과 향사별감 채명달로 하여금 행재소에 보내고, 100석은 영남의 곽재우(郭再祐)[1552~1617]에게 각종 병기와 함께 공급하였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채홍국은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왜적이 부안에 침략하자 채홍국은 부안의 호벌치에서 적을 맞아 싸웠다. 이 전투에서 결국 채홍국과 그의 아들 그리고 300여 의병들이 장렬하게 순절하였다. 이후 조정에서는 이들 300여 흥덕창의 의열에게 공을 인정하여 벼슬을 내리고 남당 회맹단에 모충사를 건립하여 호벌치 전투에서 순절한 사람들을 추모하고 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당하여 고창 충의지사들은 이와 같이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떨치고 일어나 왜적에게 항거하였고, 결국은 왜적들이 이 땅에서 퇴각하게 하였다.

[의의와 평가]

고창은 임진·정유왜란과 정묘·병자호란 그리고 이괄(李适)[1587~1624]의 난을 맞아서도 국가와 민족을 위해 한결 같은 마음으로 떨치고 일어나 싸운 대표적인 고장이다. 고창의 자랑스러운 맥을 길이 보전할 필요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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