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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800455
한자 茂長縣
영어음역 Mujang-hyeon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
지역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지도보기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박노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제정연도/일시 조선 전기
시행연도/일시 1415년연표보기
시행처 국가

[정의]

고창 지역에 설치된 조선 전기의 행정구역.

[개설]

조선 시대에 현(縣)은 지방 행정구역인 주부군현(州府郡縣) 가운데 가장 낮은 단위의 행정구역이다. 현은 지방 행정구역상 독자적으로 존재하면서도 군과 연결 지어 생각할 수 있는데 군현제도가 그것이다. 군과 현은 군이 현을 거느리는 행정적 상급 단위라기보다는 병렬적 관계였다. 군현제도는 지방을 통치하기 위한 행정 체계이고, 이는 중앙 집권화를 위한 제도적 장치였다. 따라서 전국의 군현은 정부가 동일한 정령(政令)으로 획일적이고 집중적으로 다스렸다.

[관련 기록]

『삼국사기(三國史記)』 「지리지(地理志)」 무령군(無靈郡)조에 "무송현은 본시 백제의 송미지현(松彌知縣)으로, 경덕왕이 무송(茂松)으로 개명하여 지금도 그대로 한다[茂松縣 本百濟松彌知縣 景德王改名 今因之]."라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 「지리지」 무령군조에 "장사현은 본시 백제의 상로현(上老縣)으로, 경덕왕이 장사(長沙)로 개명하여 지금도 그대로 한다[長沙縣 本百濟上老縣 景德王改名 今因之]."라고 기록되어 있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무장현조에 "무송현(茂松縣)은 본래 백제의 송미지현(松彌知縣)이었는데, 신라에서 무송현으로 고쳤으며, 장사현(長沙縣)은 본래 백제의 상로현(上老縣)이었는데, 신라에서 장사현으로 고쳤으며, 모두 영무(靈武)의 영현(領縣)으로 삼았었다. 고려에서도 그대로 따랐는데, 뒤에 두 현(縣)을 겸 감무(兼監務)로 하였다. 본조(本朝) 태종(太宗) 7년 정유에 두 현을 합하여 무장(茂長)이라 하고, 이어 진(鎭)을 두어서 병마사(兵馬使)로써 현사(縣事)를 겸하게 하였다가, 금상(今上) 5년 계묘에 병마사를 고쳐 첨절제사(僉節制使)로 하였다. 옛 속향(屬鄕)이 1이니, 약수(藥水)요, 처(處)가 1이니, 궁산(弓山)이요, 다소(茶所)가 2이니, 용산(龍山)·재역(梓亦)이다[茂長縣 茂松縣 本百濟松彌知縣 新羅改茂松縣. 長沙縣 本百濟上老縣 新羅改長沙縣 皆爲靈武領縣 高麗因之 後以兩縣兼監務. 本朝太宗七年丁酉 合兩縣 稱茂長 仍置鎭 以兵馬使兼縣事. 今上五年癸卯 改兵馬使 爲僉節制使]."라고 기록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무장현 건치 연혁조에 "무송현(茂松縣)은 본래 백제의 송미지현(松彌知縣)이었는데, 신라가 무송(茂松)이라고 고쳐서 무령군(武靈郡)의 영현으로 하였고, 고려에서는 그대로 따랐다. 장사현(長沙縣)은 본래 백제의 상로현(上老縣)이었는데, 신라가 장사라고 고쳐서 무령군의 영현으로 하였고, 고려에서는 그대로 따랐다가 뒤에 감무를 두어 무송을 겸임케 하였는데, 본조 태종 17년에 두 현을 합쳐서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진(鎭)을 두어 병마사가 현의 일을 겸임케 하였는데, 세종 5년에 병마사를 고쳐서 첨절제사로 하고 뒤에 현감으로 고쳤다[茂松縣 本百濟松彌知縣 新羅改茂松爲武靈郡領縣高麗仍之 長沙縣 本百濟上老縣 新羅改長沙爲武靈郡領縣 高麗仍之 後置監務兼任茂松 本朝太宗十七年合兩縣 改今名置鎭 以兵馬使兼縣事 世宗五年改兵馬使 爲僉節制使 後改縣監]."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지도서(輿地圖書)』 무장현 건치 연혁조와 『고창현읍지(高敞縣邑誌)』에도 비슷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변천]

무장현 지역은 조선 시대에 무송(茂松)과 장사(長沙)를 합한 지역이다. 이 중 무송은 처음에 마한 땅이었고, 백제 시대에 송미지현(松彌知縣)이었다. 757년(경덕왕 16) 지명과 행정구역 개편이 이루어지면서 무송현으로 개칭하여 이웃한 무령군[지금의 전라남도 영광군]의 영현으로 삼았다. 고려에 들어와서도 그대로 이어져 오다가 후기에 이웃한 장사감무(長沙監務)의 겸임지가 되었다. 당시의 치소는 지금의 성송면 하고리 고현마을이었다.

장사는 처음에 마한 땅이었고, 백제 시대에 상로현(上老縣)이었다. 757년(경덕왕 16) 지명과 행정구역 개편이 이루어지면서 장사현으로 개칭하여 이웃한 무령군의 영현으로 삼았다. 고려에 들어와서도 그대로 이어져 오다가 후기에 장사감무를 파견하여 이웃한 무송까지 겸임하게 하였다. 당시의 치소는 지금의 공음면 두암리 장사골이고, 그 너머 상하면 하장리에도 하장사(下長沙)라는 이름으로 흔적이 남아 있다.

1415년(태종 15) 무송과 장사를 합하여 무송의 ‘무’자와 장사의 ‘장’자를 따서 무장현이라 하였으며, 달리 송사(松沙)라고도 하였다. 당시 치소는 두 고을의 중간 지점인 지금의 무장면 성내리였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祖實錄)』에 따르면, 1417년(태종 17) 장사에 성을 쌓았다고 하였는데, 무송과 장사 중간 지점에 새로운 현의 치소를 만들면서 성을 쌓은 것으로 여겨진다.

이후 무장에 진(鎭)을 설치하고 병마사(兵馬使)를 두어 현의 행정까지 겸임하게 하였고, 1423년(세종 5) 병마사를 첨절제사(僉節制使)로 고친 뒤 현감을 두었는데, 이때 무장은 나주진관(羅州鎭管)에 속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약수향(藥水鄕)·궁산처(弓山處)·용산소(龍山所)·재역소(栽亦所) 등의 특수 행정구역이 있었고, 총 356호에 2,033명의 주민이 살았다. 『여지도서』에는 1759년(영조 35) 작성한 호적을 인용하여 총 6,817호에 2만 6661명[남자 1만 881명, 여자 1만 5780명]의 주민이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1789년(정조 13) 편찬한 것으로 추정되는 『호구총수(戶口總數)』에 따르면, 무장은 동면(東面)·이동면(二東面)·동음치면(冬音峙面)·원송면(元松面)·대제면(大梯面)·대사면(大寺面)·장자산동면(莊子山洞面)·와공면(瓦孔面)·심원면(心元面)·청해면(靑海面)·탁곡면(托谷面)·백석면(白石面)·성동면(星洞面)·하룡복면(下龍伏面)·상룡복면(上龍伏面)·오리동면(吾里洞面)의 16면 327리로 이루어졌으며, 총 3,829호에 2만 7149명[남자 1만 2555명, 여자 1만 4594명]의 주민이 살았다.

『무장군읍지(茂長郡邑誌)』에 따르면, 총 6,833호에 2만 6875명[남자 1만 2125명, 여자 1만 4750명]의 주민이 살았으나 1894년(고종 31) 이후에는 호구 수가 3,348호로 줄어들었다. 6,833호라는 호구 수의 통계 시점이 언제인지는 모르겠으나 동학농민혁명 이후 호구 수가 반가량 줄어든 것이다.

1895년 무장군이 되고 전주부에 속하였고, 이듬해 전라남도와 전라북도로 가를 때는 처음 전라남도에 속했다가 다시 전라북도로 이관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고창군 무장면이 되었다.

[현황]

무장면은 2010년 3월 현재 면적은 43.78㎢이며, 총 1,681가구에 3,490명[남자 1,754명, 여자 1,736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송현리·교흥리·원촌리·도곡리·월림리·고라리·백양리·신촌리·무장리·성내리·송계리·만화리·강남리·목우리·옥산리·덕림리 등 16개 법정리 39개 행정리를 관할하고 있다. 동쪽으로 성송면, 서쪽으로 공음면, 남쪽으로 공음면·대산면, 북쪽으로 해리면·아산면과 이웃하고 있다.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20.05.20 내용 수정 [변천] 추곡면(棰谷面) → 탁곡면(托谷面)
이용자 의견
이** 추곡면(棰谷面)이 아니라 탁곡면(托谷面)으로 수정해주세요.
  • 답변
  • 디지털고창문화대전을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해당 내용에 대하여 확인 후 수정하였습니다. 의견 개진에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2020.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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