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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800034
한자 改新敎
영어음역 Gaesingyo
영어의미역 Protestantism
분야 종교/기독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전라북도 고창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백원철

[정의]

전라북도 고창군에서 활동하는 그리스도교의 한 분파.

[개설]

개신교는 종교개혁의 결과로 로마 가톨릭에서 분리되었으며 로마 가톨릭, 동방정교[그리스정교]와 더불어 기독교 3대 교파 중 하나가 되었다. 전 세계에는 루터교(Lutheran), 개혁교회(Reformed Church), 장로교(Presbyterian), 성공회(Anglican), 침례교(Baptist), 감리교(Methodist), 성결교(Holiness Church), 안식교(安息敎), 구세군(救世軍), 퀘이커(Quaker) 등 수백 개의 개신교 교파가 존재하며 한국에도 200여 개가 있다.

[변천]

1. 개신교의 전래

고창군의 개신교 선교는 미국 남장로교에 의해 시작되었다. 19세기에 이미 세계 각국에 선교사를 파견하고 있던 미국 남장로교는 자국의 북장로교에 의해 선교의 문이 활짝 열린 한국에 대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특히 언더우드 선교사의 한국 선교 관련 강연에 감동을 받은 몇몇 신학생들은 이미 서울에서 선교 활동을 하고 있던 북장로교 선교사 마펫(S. A. Moffett), 리(G. Lee) 등의 도움으로 한국 선교를 위한 첫발을 내딛었다.

그러나 당시 한국에 들어와 활동하던 남장로교 선교사들은 이미 활동하고 있던 북장로교, 호주 장로교, 캐나다 장로교 선교사들과의 선교 구역을 조정해야 했다. 1893년 1월 28일 미국 남·북장로교 선교사들은 ‘장로교 선교부 공의회’를 조직하고 호주 장로교와 캐나다 장로교까지 가입시켜 한국에 들어온 4개 장로교가 함께하는 ‘합동공의회’를 결성하였다.

공의회는 선교 구역 설정 논의를 통해 미국 북장로교에서 개척한 황해도, 평안도, 서울 지역에다 대구, 안동 지역을 추가하여 미국 북장로교 선교 구역으로, 미개척지인 전라도와 충청도는 미국 남장로교의 선교 구역으로 할당하였다. 전라도와 남장로교의 인연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남장로교 선교회[미션회]는 1894년 정기연례회에서 전주선교부를 창설하기로 결정하고 1차로 최의덕(Lewis Boyd Tate)·최마태(Mattie Samuel Tate) 남매를, 2차로 배유지(E. Bell) 선교사 부부와 유대모(A. D. Drew) 선교사 부부 등을 파견하였다. 이 시기 전주, 군산, 목포 등 3곳에는 선교부[미션 스테이션]가 세워졌다.

선교사들은 선교부를 중심으로 각각 자기 담당 지역을 맡아 선교하였다. 전주선교부에는 군산선교부를 제외한 지금의 전라북도 지역 전체가 할당되었는데 고창을 비롯한 인근 부안, 남원, 정읍, 김제 등 전주 서남부를 담당한 선교사는 최의덕이었다. 1901년~1906년 사이에 전라남도, 전라북도, 충청남도 지역에 무려 70여 개의 교회가 설립됐는데, 문헌 기록상 고창군에서 역사가 가장 오래된 신촌교회도 역시 이 시기인 1903년 신림면에 설립되었다.

2. 전서노회의 설립

『조선예수교장로교 사기(史記)』에는 ‘1910년 목사 최중진이 자유교를 주장하매 태인, 부안, 정읍, 임실 등 각 군 교회가 부지(附知)하여 전북교회에 대동요를 기하니라’라는 기록이 나온다. 최중진 목사는 테이트 목사를 도와 정읍, 태인 등지에서 목회하던 중 1909년경 전라대리회에 편지를 보내 5개 항의 요구 조건을 제시하였다.

요구 조건은 첫째 학습 교인도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게 할 것. 둘째 부안 지방을 나에게 되돌려 주고 고창, 무장도 나에게 맡길 것. 셋째 나의 지역에 중등학교를 세워 줄 것. 넷째 가난한 교인들을 구제할 것. 다섯째 집 한 채를 사 줄 것 등이었다.

그러나 전라대리회에서 요청을 들어주지 않자 최중진 목사는 자유교회를 선언하고 나섰다. 당시 그의 영향을 받았던 고창 지역에서는 흥덕교회가 자유교회로 넘어갔고 신촌교회에서도 소동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1911년 9월 전라대리회가 전라노회로 승격되었고 1917년에는 전라노회가 전북노회와 전남노회로 분립하였다. 고창의 교회가 전북노회로 전입한 것은 1949년의 일이었다. 1949년에 전북노회로 전입되었던 고창군 지역의 교회는 1955년 3월 8일 전북노회 제48회 정기노회에서 다시 분립하기로 결정되었다.

이 결정에 따라 서울 승동교회에서 열린 제40회 총회에서 정읍군, 고창군, 부안군의 분리 독립이 승인되어 전서노회가 성립되었다. 당시 전서노회에 소속된 고창군의 교회는 고창읍교회, 신촌교회, 용산교회, 하오산교회, 흥덕교회, 덕암교회, 무장교회, 해리교회, 석교교회, 대산교회, 심원교회, 동호교회, 월명교회, 동림교회, 봉암교회, 상하교회 등이었다.

3. 교단의 분열

고창군의 개신교는 1959년 통합[애큐메니칼] 측과 합동[NAE] 측의 분열로 시련을 겪게 되었다. 에큐메니칼운동을 위해 장로교회가 그 운동의 본부인 W.C.C에 가입한 것이 분열의 원인이었다. 통합 측과 합동 측의 분열은 전서노회에도 회오리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전서노회도 통합 측과 합동 측으로 나누어 노회가 열리게 된 것이었다.

1960년 2월 29일 합동 측 지지자들이 당시 전서노회장 김종호 목사의 명의로 정읍성광교회에서 임시노회를 소집하였다. 이들은 노회장소 정문에서 통합총회에 참석했던 인사들을 제지하며 입장을 막았고 통합 측 일부 목사를 제명 처분하였다. 이에 같은 해 3월 25일에 통합측이 신태인중앙교회에 모여 통합총회 보고대회와 임시노회를 가지려 했으나 반대 측의 방해로 회의 진행이 불가능해지자 회원들은 9대의 화물트럭에 분승하고 화호교회로 장소를 옮겨 회의를 속개하였다. 이후로 고창군의 고창읍교회, 신촌교회, 용산교회, 덕암교회, 석교교회, 대산교회, 심원교회, 월명교회, 상하교회, 아산교회 등이 통합 측에 소속되어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다.

[현황]

고창군의 개신교 교회는 2000년 102개에서 2005년 107개로 5개가 증가했고 반면 목사 및 전도사 수는 2000년 185명에서 2005년 171명으로 14명이 감소했으며 개신교 인구는 8,871명인 것으로 집계되었다. 또한 한국컴퓨터선교회[KCM]에 의하면 2006년 기준으로 고창군의 개신교 교회는 다시 1개가 늘어난 108개이며 개신교 인구 비율은 15.9%로, 전라북도의 평균치를 하회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2011년 현재 고창군 기독교연합회에 의하면 고창군의 개신교 교회는 106개이고 개신교 인구는 약 만명에 달한다고 한다.

[의의와 평가]

개신교가 새로운 종교로서 전 계층에 걸쳐 쉽게 접근할 수 있었던 이유는 빈부귀천에 차이를 두지 않고 선교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서민 계급에 더 큰 비중을 두고 그들에게 근대교육을 받을 기회까지 제공했기 때문일 것이다.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에 의해 처음 시작된 고창의 개신교는 불교 인구가 많고 보수적인 경향이 짙은 이곳 사람들을 쉽게 전도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교사들은 교육 기관을 설립하고 문맹 퇴치에 앞장서면서 지역 사회에 조금씩 다가가기 시작하였다. 신촌교회가 운영한 소학교, 오산교회가 설립한 흥덕학당과 오산고등보통학교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러한 활동들을 통해 고창군의 개신교는 ‘지역 사회 복음화’라는 본래 목적 외에도 문맹 퇴치, 인재 양성, 근대 문물 전파 등 여러 측면에서 고창군의 근대화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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