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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800007
한자 高敞茂長縣官衙-邑城
영어공식명칭 Mujang-hyeon Government Office And Town Wall
영어음역 Mujang-hyeon Gwanawa Eupseong
이칭/별칭 무장현 관아와 읍성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유적(일반)
지역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 성내리 149-1 외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강원종장창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문화재 지정 일시 1991년 2월 26일연표보기 - 고창 무장현 관아와 읍성 사적 제346호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21년 11월 19일 - 고창 무장현 관아와 읍성 사적 재지정
성격 읍성|관아
건립시기/연도 1417년[무장읍성]연표보기
관련인물 김저래
면적 205,997㎡
소재지 주소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 성내리 149-1 외 일원지도보기
소유자 고창군
문화재 지정번호 사적

[정의]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 성내리에 있는 조선 시대 석축 읍성 및 관아 건물.

[개설]

1991년 2월 26일 사적 346호로 지정된 무장읍성은 1417년(태종 17) 무송현(茂松縣)장사현(長沙縣)을 합쳐 그 중간 지점에 무장현을 두고 축조한 건물이다.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사적으로 재지정되었다. 남문과 동문 등 2개의 성문이 있었으며, 그중 남문인 진무루(鎭茂樓)는 복원되어 있다. 성내에는 취백당(翠白堂)의 동헌과 송사지관(松沙之館)이란 현판이 붙어 있는 객사가 자리하고 있다.

무장읍성은 행정적인 기능보다 군사적인 거점 지역으로서의 기능이 더 강한 읍성으로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무장현의 설치와 함께 무장진(茂長鎭)의 병마사가 현의 업무를 관장하고 있는 데서도 알 수 있다. 무장진은 1417년 왜구 방어를 위해서 전라병영을 광산현(光山縣)에서 강진현(康津縣)으로 옮기면서 방어 지역의 중첩을 피하기 위해 기존의 흥덕진(興德鎭)을 부안진(扶安鎭)으로, 목포진(木浦鎭)을 무장진으로 옮겨 설치하게 되었다. 그러나 세종 이후 현감이 파견되면서 무장진은 폐지되었다.

[건립경위]

무장읍성은 1417년 왜구의 노략질과 침입을 막기 위해 병마사 김저래(金著來)가 무송현장사현을 통합하여 현재의 위치에 축조한 것으로, 성내에는 객사와 동헌, 진무루 등 옛 건물이 남아 있다. 당시 무송과 장사 사이의 중간 지점인 무장(茂長)에 터전을 잡고 진성을 쌓은 뒤 ‘무송’과 ‘장사’에서 첫 글자를 따서 ‘무장’으로 했다고 전한다. 여러 고을의 백성과 승려 2만여 명을 동원해 돌로 축성한 석성이었으나 훗날 허물어진 곳을 흙으로 보강하며 토성이 되었다고 한다.

무장현은 지정학적으로 고창의 서부 지역의 중심을 이루는 곳으로, 이 지역은 대부분 해안가를 끼고 있다. 따라서 이 지역의 바닷길은 인력과 물자가 쉽게 이동할 수 있는 통로로도 이용되지만 외적의 침입을 쉽게 받기도 한다. 이에 따라 고려 후기와 조선 전기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고 백성들의 생계와 안위를 위해서는 읍성을 축조하는 것이 불가피했을 것이다.

무장읍성이 축조된 배경을 역사적 관점에서 살펴보면, 먼저 고창군의 서부 지역에 삼국 시대부터 2개의 현, 곧 무송현장사현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고려 말에서 조선 초 왜구의 침입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은 고창현에는 고창읍성을, 흥덕현에는 흥덕읍성흥덕진을, 무장현에는 무장읍성무장진을 배치하여 왜구를 방어하게 되었다.

연해 읍성의 축성은 1415년(태종 15)부터 시작된다. 무장읍성은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비롯한 여러 지리지에 1417년에 축조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 후기에 간행된 『무장군읍지(茂長郡邑誌)』 등 무장현과 관련한 기록이 수록된 지리지 등에는 “1417년 병마사 김저래 때 전라도 각 관의 승려와 백성 2만 수천여 명을 무장에 데려와서 읍성을 쌓고 공아(公衙)와 관사(官舍)를 세웠는데 2월에 시작하여 5월에 끝마쳤다고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위치]

무장읍성은 고창터미널에서 14㎞ 거리에 위치해 있다. 고창 IC에서 고창읍성 방향의 반대편으로 국도 15호선을 따라가면 된다. 이후 무장읍성의 정문 역할을 하는 남문인 진무루(振武樓) 누각을 찾으면 된다. 무장읍성은 진무루에서 무장초등학교 뒷산을 거쳐, 해리면으로 가는 도로의 좌편까지 뻗어 있다.

[형태]

무장읍성은 높이 60m의 사두봉을 중심으로 구릉성 야산을 장방형으로 에워싸고 있는 평지 읍성이다. 우리나라 읍성들이 주로 배산임수형의 지형에 입지하고 있는 반면에 무장읍성은 구릉성 야산으로 이루어진 너른 들판 한가운데, 곧 분지의 지형에 입지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체성(體城)은 내벽과 외벽을 모두 돌로 쌓은 협축식으로, 둘레는 1,140m이며, 동벽 228m, 서벽 258m, 북벽 314m, 남벽 340m 정도이다. 성벽의 규모와 관련된 문헌 기록을 보면,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는 658보,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2,639척, 『문종실록(文宗實錄)』에는 1,476척, 『조선보물고적자료』에는 550간(間)으로 다양하지만, 대부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기록을 그대로 옮기고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의 규모를 현재의 단위로 환산하면 영조척(營造尺)[30.8㎝]을 적용했을 경우 1,220m이며,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규모를 포백척(布帛尺)[46.66㎝]으로 환산하면 1,230m로 현재 읍성의 규모와 큰 차이가 없다.

『문종실록』권9에는 “무장현 읍성은 둘레가 1,470자, 높이 7자, 여장(女墻)의 높이는 1척이며, 문이 2개소 있는데, 옹성(甕城)이 있고 해자의 둘레는 2,127자, 적대(敵臺)가 없으며 여장이 471자입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위의 내용으로 보아 성곽과 관련된 기본 시설이 모두 갖추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성벽에서 밖으로 돌출시킨 치성(雉城)과 관아 건물 가운데 일부가 당시까지는 완성되지 못한 것으로 짐작된다.

성벽의 축조 방법을 보면, 먼저 성벽의 기저를 구획한 후 구릉을 L자형으로 깎아 낸 후 석축부를 수직으로 쌓으면서 내탁을 하였다. 성석 올리기는 기반토를 정지한 후 기단석을 놓고 성석을 쌓아 올리면서 채움석을 넣었고, 어느 정도 석축부가 완성되면 흙을 이용하여 내탁하였다. 성돌은 자연석으로 비교적 반듯한 면을 외면으로 하였다.

성문은 남문과 동문 2개소이며, 바깥쪽에는 반원형의 편문식 옹성을 설치하였다. 남문인 진무루는 1612년(광해군 4)에 개건된 이래 여러 차례 보수를 하였다. 진무루의 연혁을 보면, 1417년 읍성 축조 때 초창되었는데, 진무루의 상량문(上樑文)에 의하면 1581년 개건된 이후 1612년 외 다섯 번에 걸쳐 개건과 중창이 계속되었으며, 1975년 남문 석축 보수, 1984년 남문 해체 보수 등을 걸쳐 1990년대에도 보수와 정비가 이루어졌다.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다.

너비는 정면 4.3m이고 기둥의 간격은 2.8m이다. 측면의 기둥 간격은 3.2m이고, 전면 석축까지 1.7m이다. 육축부의 축대는 2.8m이다. 통로는 돌계단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좌우는 석축으로 쌓여 있다. 문루는 지상에서 2.0m 위에 설치되었으며, 누의 가장자리에 난간이 돌려져 있다. 너비 4.3m의 계단 통로 좌우에 높이 2.8m의 석축을 쌓고 중간에 폭 3.1m의 문지가 남아 있다. 문루는 5칸으로 바깥 기둥만을 세웠다.

동문 터에서는 옹성이 확인되었는데, 성 안에서 볼 때 시계 방향으로 둘러진 형태이며 반원형의 편문식이다. 개구부는 동쪽에 위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남문의 구조와 비슷한 문루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치(雉)는 성벽이 꺾이는 모서리나 성벽의 중간에 설치한 시설로, 문헌에 전하는 기록은 없다. 다만 2005년 조사에서 남벽에 연결한 것으로 보이는 치의 반원형 일부가 확인된 바 있다.

『문종실록』에 따르면 무장읍성의 해자는 둘레 2,127자로서 성벽의 거의 두 배 규모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해자는 서벽과 남벽, 북벽에서 일부 확인되었다. 성벽에서 적게는 2.4m, 많게는 6.0m 남짓한 바깥쪽에서 해자가 확인되었는데, 기반토를 U자 형태로 굴착한 후 그대로 또는 돌을 이용하여 만들었다. 해자의 폭은 2.7~11m 정도이다.

관아 건물 역시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무장현읍지(茂長縣邑誌)』 등의 기록을 보면 1417년 무장진병마사 김저래가 완공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동헌은 현감이 집무하던 곳으로 객사의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1973년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35호로 지정되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무장초등학교 교실로 이용되었다. 동헌은 무장읍성 축성 당시 창건되었다고 추정되고 있으나, 1635년(인조 13)에 축조되어 1728년(영조 4), 1839년(헌종 5) 등 여러 차례에 걸쳐 개건되었다고 한다. 1983년 중창을 한 후 전면에 취백당이란 현판을 걸어 두었다. 규모는 정면 6칸, 측면 4칸으로, 네 귀에 추녀를 설치하고 겹처마 형식을 하여 건물 전체가 장중한 느낌을 준다.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34호로 지정된 무장객사는 1581년(선조 14)에 건립되었다고 전하며, 면사무소로 이용되었다가 1990년에 원형대로 복원되었다. 객사는 『무장현읍지』 등의 기록을 참고하면 읍성의 축조와 함께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1988년에 발견된 상량문에 의하면 1649년(인조 27), 1736년(영조 12)에 중수한 것으로 밝혀졌다. 문관이 이용하는 좌익헌(左翼軒)은 1895년(고종 26)에 신축했음이 밝혀졌고, 무관이 이용한 우익헌(右翼軒)은 1849년에 중수되었을 알 수 있어 초기에 축조된 객사가 아닌 중수 과정에서 건립된 객사로 추정된다.

객사의 규모는 먼저 정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 홑처마 맞배지붕이며, ‘송사지관’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좌우 익헌은 4칸이며 팔작지붕이다. 건물은 높이 80㎝의 축대 위에 세워져 있으며, 가운데에 계단을 두었다. 돌계단 마무리 옆에는 태극무늬, 측면에는 동물과 나무 구름무늬 등이 양각되어 있고, 계단 양 옆의 축대 돌에도 연꽃과 꽃병에 꽃이 담긴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이외에도 성황당이 성내에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며, 책실(冊室)·작청(作廳)·현사(縣舍)·읍취루(揖翠樓)·문루(門樓)·관노청(官奴廳) 등의 건물 터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황]

고창군에서는 무장읍성 복원 사업의 일환으로 두 차례에 걸쳐 학술 조사를 실시했는데, 이때 성벽 통과 선의 형태는 물론 성벽의 일부 구간의 조사를 통해 축조 방법을 파악하였다. 그리고 남문인 진무루의 정확한 위치 및 옹성의 존재도 확인하는 한편 동문 터의 존재를 확인하고 옹성의 유무도 확인하였다. 또한 성내의 건물 중 동헌 및 객사 이외 지역의 시굴 조사를 통해 많은 건물 터를 확인했으며, 기와편과 분청사기, 백자편 등이 다량 분포하고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그동안 흙으로 축조된 토성으로 알려져 왔던 무장읍성은 공사 때에 성벽 동쪽 끝부분의 단면이 드러나면서 성곽 일부가 흙과 돌을 섞어서 축조된 것임이 밝혀졌다. 현재 남아 있는 무장객사는 1581년(선조 14)에 세워진 것으로,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34호로 지정되어 있다. 무장동헌은 1565년(명종 20)에 건립되었으며,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무장초등학교의 교사(校舍)로 쓰이면서 변경되었던 것을 1984년에 원형에 가깝게 복원하였다.

무장읍성에는 무장객사, 무장동헌, 진무루 등 옛 건물이 그대로 남아 있어 조선 시대 읍치와 옛 읍성의 모습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현재 고창 지역에서는 2002년부터 무장읍성의 예전 성곽을 재현하여 새로운 전통 문화를 창조하는 기반을 조성하는 한편, 무장읍성 복원정비사업을 단계별로 성역화하고 있다. 2014년까지 무장읍성과 관아, 성곽, 건물 등을 원형에 가깝게 복원한다는 계획이다.

[의의와 평가]

무장읍성은 삼국 시대 이래 치소지였던 무송현장사현을 합쳐 그 중간 지점인 새로운 곳에 두 현의 앞 글자를 따서 무장현으로 통합되었던 점이 괄목할 만하다. 무장현의 축조는 여말선초 왜구의 침입으로 백성들의 인명과 재산의 피해를 막기 위해서이다. 또한 조선 시대 해안 방어를 위해 축조된 무장현에는 무장진을 두어 군사적인 기능을 한층 강화시킨 읍성이라고 할 수 있다. 앞으로 무장읍성의 복원 사업에 따라 학술적인 조사가 계속되어 성곽 및 성내 시설 등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가 확보된다면 무장읍성은 조선 시대 전기 읍성에 대한 귀중한 학술적, 문화재적 가치가 발견될 것으로 판단된다.

무장읍성은 1894년 일어났던 동학 농민 혁명의 동학 농민군들이 맨 처음 봉기하였던 역사의 현장이다. 이곳에서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은 1894년 3월 20일 ‘보국안민(輔國安民)’을 내세운 창의포고문을 선포하고 거국적인 봉기를 선언했다. 동학 농민군의 흔적은 무장읍성 객사의 현판을 갑오 농민군의 자치 기구인 집강소라고 붙인 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2008년부터 동학 농민 혁명 정신을 계승시키고 전국적인 봉기의 시발점이 된 무장기포의 역사적 의미와 무장읍성에 대한 향토문화의 우수성을 선양하기 위하여 ‘동학농민혁명 무장기포 기념제와 무장읍성축제’가 열리고 있다. 이 축제는 2010년 4월 25일부터 26일까지 관아 및 집강소 운영, 동학 농민군 군영체험, 동학 농민 혁명 자료 전시 등을 위주로 개최되었다.

[참고문헌]
이용자 의견
관** 디지털고창문화대전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도움이 되셨다니 저희도 기쁩니다. 퍼가신 사진은 상업적 용도 외로는 사용 가능하나, 게재시 출처를 "한국학중앙연구원"으로 표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12.09.20
배** 너무 잘 봤습니다. ^^ 고창문화연구에서 읍성에 대해 정리를 하는 중이었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보다가 몰랐던 것도 좀 알게되었고 사전을 찾으며 모르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에 감사합니다.
사진을 몇장 퍼간것이 있는데 혹시 누가 된다면 바로 삭제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
2012.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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