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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당 형님에 대한 기억을 안고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8B030101
지역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 진마마을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한미옥

[우하당의 새 주인]

부안면 선운리 진마마을 서정주 시인의 생가 바로 옆에는 ‘우하당(又下堂)’이란 현판이 걸린 작고 아담한 초가 한 채가 서 있다. 그리고 그 안에 서정주 선생의 동생 서정태[1923년생] 씨가 살고 있다. 우하당 주인의 첫인상은 무척이나 깔끔했고, 그러면서 선비의 기품이 느껴졌다. 여든 살이 넘은 고령의 할아버지가 사는 집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깨끗하게 정리된 집 안을 보더라도 그 집주인의 성품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우리 아버지가 말이여, 이 마을 훈장으로 오셨어. 옛날에는 동네 서당 훈장은 인근에 소문난 문장가라야만 훈장을 와. 본시 우리 아버지는 질마재 분이 아니라 심원면, 심원면 두월리에서 살았는데, 거게서 살아서 어렸을 때부터 아조, 그, 한학에 유명해.”

서정태 씨의 아버지, 그러니까 서정주 시인의 아버지는 한학자였다고 한다. 젊은 시절 고창의 향시에서 장원을 했을 정도로 총명했던 아버지는, 그러나 할아버지의 도박으로 가세가 기울자 먹고 살기 위해 열여덟 살에 고향을 떠나 진마마을 훈장으로 들어오게 되었다고 한다. 이때 아버지의 동문이 중매를 서서 이곳 진마마을 처자와 결혼해 정착하게 된 것이다. 이후 아버지의 재능을 아깝게 여긴 무장현감의 도움을 받아 서울의 한성학원에서 2년간 신학문을 배우기도 했다고.

공부를 하고 다시 진마마을로 내려온 서정주 시인의 아버지는 토지 측량기사로 일했는데, 이런 아버지의 경제력 덕분에 가족들은 줄포로 이사했고, 5남매 모두 신학문을 배울 수 있었다고 한다. 줄포로 이사할 무렵 서정주 시인은 열 살이었다고 한다. 서정주 시인의 가족은 진마마을을 떠났지만, 그러나 마지막까지 서정주 시인의 생가에는 할머니와 종형 내외가 거주하고 있었다고 한다.

[바람 같은 형님 따라 바람처럼 살다]

서정태 씨에게 미당 형님은 어떤 의미일까. 그는 평생을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고 싶었다고 한다. 미당이 그의 시 「자화상」에서 “나를 키운 것은 팔 할이 바람”이라고 했듯이, 서정태 씨도 그러한 삶을 갈망했단다. 하지만 대개의 사람들이 그렇듯 결혼과 함께 그는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삶을 살지 못했다. 그러나 그 소망의 힘이 워낙 강했기에 결국 환갑을 넘긴 나이에 부인과 아이들에게 이제 자유롭게 혼자 돌아다니며 살고 싶다고 선언하고 집을 나와 버렸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강원도 춘천 등지로 떠돌며 살다가, 결국 다시 돌아온 것이 바로 고향 마을인 진마였다. 그날이 바로 2009년 2월 27일이었다.

“여, 11년간. 가만히 생각허니까 고향이 젤 만만해. 그래서 여그를, 생가 옆에. [그 전에] 여기 어떻게 가난한 사람이 살았는지, 기둥도 소나무 기둥이 아니고 미루나무 기둥으로 진 집이 났어. 그래서 요걸 사 놓고. 근데 좀 고쳐 놔. 내가 방은 뭐, 여러 개 내가 첨부터 버리고, 하나. 부엌 한 칸. 여그도 방 두 개짜리여. 그래서 여가 와서 인제 살게 되었단 말이여.”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고자 했던 서정태 씨. 하지만 그는 고향인 이곳 진마마을로 내려와서 더 바빠졌다고 한다. 매일 생가를 살피고, 미당 형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려고 들어오는 잡지사나 신문사 그리고 방송사들의 인터뷰에 응하느라 여든을 훌쩍 넘긴 고령에도 마을 사람들과 잡담을 나눌 새가 없다.

현재 진마마을은 농림수산식품부에서 시행하는 ‘농촌마을종합개발사업’에 선정되어 ‘시문학과 농촌 생활이 공존하는 마을’이라는 테마로 장기 계획을 수립하고 있다. 그러기에 그것과 관련된 일도 소홀함이 없도록 살펴야 하고 행사에도 참석해야 한다. 해마다 11월 초에 열리는 미당시문학제는 2009년 11월 7일에 미당시문학관에서 5회째 행사가 열렸으며, 질마재문화축제도 시작되었다. 그리고 12월 24일 미당의 기일에 맞추어 열리는 추모제가 올해로 9회째가 된다. 이런 저런 일로 조용한 시골 마을에서의 그의 삶은 결코 조용하게 흘러가지 못하고 있다.

“완전 자유…… 그런디. 그러게 안 돼. 세금도 내야 하고. 아 이놈의 것이, 구속되는 것이 여러 가지가 있어. 그래서 이게 완전 자유란 것은 있을 수가 없다. 우리가 이상향은 완전 자유를 지금 쟁취헐라고 허는 거거든. 근데 그것이…….”

서정태 씨는 이곳에 와서도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완전한 자유는 얻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바람같이 살고자 했던 그의 삶이 이곳 진마마을에서 미당 형님의 기억과 함께 한 송이 작은 들국화로 피어나고 있지는 않을까. 미당의 자작시 「들국화」를 들어 보자.

흰옷 입은 채 들길 가다가/ 먼먼 훗날/ 만나자 언약한 꽃이여

기다림이 초조하고 안타깝기로/ 거기에 혼자서 피다니

가슴 뛰던 젊음의 여름날이 지나/ 서릿발 같은 이 벌판에/ 그리움에 지친 꽃

나도/ 이제는 마지막 눈물짓는 날/ 들국화/ 그대 곁에 살란다.

[정보제공]

  • •  서정태(남, 1923년생, 부안면 선운리 진마마을 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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