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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평리 이장으로 살아 온 세월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8A030101
지역 전라북도 고창군 신림면 가평리 가평마을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한미옥

[가평리 이장 고남규 씨]

고남규 씨는 현재 신림면 가평리 가평마을 이장을 맡고 있다. 그가 마을 이장을 맡은 것은 이번이 두 번째로, 처음 마을 일을 맡았을 때[1958년 2월]는 불과 열아홉 살의 풋내기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이장 직을 내놓고 지금까지 학교 일과 향교 일만 거들며 살아온 그가 오랜 시간이 흘러서 올해[2009년, 2008년 12월 선출] 다시 이장이 되었다. 하지만 이장이든 아니든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가평마을에 대한 고남규 씨의 애정은 변함이 없다.

가평마을은 방장산으로 둘러싸인 탓에 논밭이 적은 지형적 한계를 갖고 있었다. 이 때문에 과거에는 집집마다 소를 몇 마리씩 키워서 자녀들 학비로 쓰는 경우가 많았다.

“소득이라는 것은 소 키우는 거빼께[것밖에] 없어. 소 새끼 나믄 고놈 팔아서 아그들, 저, 대학도 등록금 주고. 1년에 [송아지를] 하나쓱 나니까. 근게 딸 여우고 헌 것도. 인자, 이, 쇠말뚝에다 절헌다는 것이, 소, 소말뚝. 그전에 다 갈칠 때, 소득이 없으니까. 소는 금방, 오늘 필요허다 그믄[그러면] 소는 끌고 가믄 금방 돈을 갖고 와. 요새 말허자믄 통장에다 넣는 식인데. 그런게 그 외에는 돈이 없어. 소에서 소득 해 갖고. 급허믄 고놈, 소 팔믄 금방 돈이 나오니까. 그냥 현찰이여.”

논밭이 많지 않은 탓에 소가 ‘현찰’이었던 가평마을을 지금과 같은 부촌으로 만들기 위해 고남규 씨는 이장이 되기 전부터 마을 사람들과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3년 전에는 가평마을이 농촌전통테마마을[고색창연마을]로 선정되기까지 했으니, 그가 마을에 갖는 애정이 얼마나 깊은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마을 일과 향교 일이 전부인 인생]

마을 일과 함께 고남규 씨가 애정을 쏟는 곳이 바로 향교이다. 젊은 시절부터 전교[향교에서 총무에 해당] 직을 맡아 오던 흥덕향교[흥덕면 교운리 소재]의 보수를 위해 유림들에게 쌀 1천 석을 거둔 일은 그가 두고두고 흐뭇해하는 일 중 하나이다. 마을 일을 맡고 있는 지금도 그는 매달 초하루와 보름이면 반드시 향교에 나가서 전교 일을 보고 있다.

“근게 사십 미만에 사십 이짝 저짝에 전교를 했어. 1977년 2월에. 근게 거그서, 그때는 기동력이 없은게 걸어 댕겨야 허고 근게……[힘이 들지]. [향교 보수를 위해서] 돈을 [걷으러] 댕겼어. 한 가마니 이상인게, 내라 헌 사람은 내고. 부자들은 많이 내라 허고, 없는 사람은 한 가마니쓱 내고 해서. 그때 천 석을 걷었어. 그래갖고 그놈 보수 허고는, 한 1년. 싹 끝내 놓고는, 인자 그만 둔다 헌게. 임기가 2년인디. 1년만 더 있다가 허제, 일 다 해 놓고 왜 금방 그만 둘라 허냐 해서. 내가 2년, 2년을 다 끝내고…….”

이렇게 힘들게 향교 보수를 위한 모금을 하고, 또 그 일을 무사히 마치고 나서 그는 전교 직을 그만 두고자 했다. 하지만 사람들의 만류로 결국 지금까지 향교 일을 맡아 보고 있는 것이다. 고남규 씨에게 마을 일과 향교 일은 지금의 그를 있게 한 중요한 두 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힘들었지만 부지런하게 살았던 세월]

고남규 씨는 1945년 12월 26일[음력], 해방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를 잃었다. 겨우 일곱 살 어린 나이였다. 하지만 어머니와 할아버지 덕분에 여덟 살 때인 1947년부터 4년간 마을에서 운영하는 서당에서 공부를 할 수 있었다.

당시에 서당은 1년에 여름과 겨울 두 차례만 열렸는데, 훈장은 쌀 한 가마니를 받고 아이들을 가르쳤다. 이 쌀 한 가마니도 혼자서 모두 내는 것이 아니고 서당에 다니는 학생들이 모아서 주는 것이었으니, 만약 학생 수가 모자라 쌀 한 가마니를 만들어 주지 못하면 그 계절에는 서당이 열리지 않았다. 그래도 없는 것은 아니니, 서당이 열리는 동안은 기쁘게 공부를 할 수 있어서 좋았다고 한다.

“그때 그것도 못 배운 사람이 많했어. 그도 못 헌게 인자, 이, 담살이, 깔담살이[남의 집에 가서 일을 도와주고 밥을 얻어먹는 것]도 나가고. 또 어느 정도 나이가 먹으믄…… [못 배우고]. 또, 한 가마니, 놉[여기서는 서당 학비를 의미]이 한 가마니도 받고. 또, 인자, 한 섬도 받고. 인자, 그런 일들 많이 했제.”

스물세 살 때 상하면 검산마을에 사는 스물한 살의 김길순 씨와 결혼을 하고 3남 3녀의 자녀를 두는 동안, 고남규 씨는 이모부가 운영하는 한약방에서 배운 지식으로 1960년부터 1962년까지 동네에서 약방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돈도 되지 않고 외출도 자유롭게 할 수 없는 약방 일을 곧 집어치우고 농사만 짓다가, 마흔다섯 살 때인 1984년 인근 가평초등학교에 기능직 공무원으로 취직해서 2000년에 인근 신림중학교로 옮겼다가 흥덕면에 있는 흥덕초등학교에서 예순한 살로 정년을 맞았다. 참으로 부지런히 살아온 지난 세월이었다.

누구보다도 고향 마을을 사랑하는 고남규 이장. 하지만 그는 올 한 해 딱 1년만 이장을 맡고 젊은 사람들에게 물려 줄 생각이란다. 젊은 사람들이 마을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마을이 발전한다는 그의 말에서 마을에 대한 한없는 애정이 묻어난다.

[정보제공]

  • •  고남규(남, 1939년생, 신림면 가평리 가평마을 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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