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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831089
한자 車京石
영어공식명칭 Cha Gyeongseog
이칭/별칭 차월곡(車月谷),차천자(車天子),차윤홍(車輪洪),경석(京石)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종교인
지역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 연기길 29-35[용산리 490-1]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이병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80년연표보기 - 차경석 출생
몰년 시기/일시 1936년 윤3월 10일연표보기 - 차경석 사망
출생지 고창군 -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 연기길 29-35[용산리 490-1]지도보기
활동지 보천교당 - 전라북도 정읍시 입암면 대흥리
성격 종교인
성별 남성
대표 경력 보천교 교주

[정의]

일제 강점기 전라북도 고창 출신의 보천교 교주.

[개설]

본관은 연안(延安). 본명은 차윤홍(車輪洪), 자는 경석(京石), 호는 차월곡(車月谷)·차천자(車天子). 아버지는 동학 접주 차치구(車致九)[1851~1894]이고, 어머니는 밀양 박씨(密陽 朴氏)이다. 4남 1녀 중 큰아들이다. 슬하에 3남 5녀를 두었다. 구례 화엄사와 고창 선운사 등을 지킨 차일혁 경무관이 차경석(車京石)[1880~1936]의 아들로 알려져 있다.

[활동 사항]

차경석은 1880년(고종 17)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 연기길 29-35[용산리 490-1]에서 태어났다. 차경석용산리 연기동에서 태어난 것은 아버지 차치구가 양반들의 횡포에 맞서 완력을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차치구는 1880년 신변에 위협을 느끼자 태기가 있던 부인을 데리고 외부와 차단된 용산리 연기동에서 차경석을 낳았다. 동학의 정읍 접주였던 차치구는 1893년(고종 30) 전봉준(全琫準)의 설득으로 동학농민혁명에 가담하였다.

1894(고종 31) 2월 차치구 부자는 전봉준과 함께 고부 관아를 습격하였다. 같은 해 3월 20일 고창 무장에서 포고문이 선포되고 전면적인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났을 때도 차치구 부자는 전봉준과 함께하였다. 그해 11월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패퇴한 차경석 부자는 전봉준과 함께 전라북도 순창군 쌍치면 피노리로 피신하여 끝까지 전봉준을 보좌하였다. 이후 차치구는 정읍 국사봉 토굴에 숨어 지내다가 관군에게 잡혀 고창군 흥덕에서 분살형을 당하였다. 당시 15세였던 차경석은 형장을 찾아가 시체더미 속에서 아버지의 시신을 수습해 화장한 후 유골을 내장사 부근에 뿌렸다.

차경석은 1898년(고종 35) 11월 고창군 흥덕에서 영학당을 조직하여 흥덕 관아를 습격하고 관아를 차지했다가 퇴각하였다. 1899년 5월 흥덕에서 호남공동대회를 개최하였고, 5월 27일 고부에서 봉기한 뒤 흥덕·무장의 군아를 차례로 점령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체포되었다가 사형 직전 집행 사령의 호의로 석방되었다. 1901년 차경석은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동학농민혁명에 가담하였고, 일진회에 가입해 전남북도 순회관으로 활동하였다. 1905년(고종 42) 12월 일진회가 일제의 조선 침략 앞잡이로 친일을 하자 탈퇴하고, 손병희를 추종하였다.

1907년(순종 1) 5월 17일, 차경석은 김제 원평 장터에서 강증산(姜甑山)을 만나 증산도에 입문하였다. 1908년 강일순은 차경석의 이종누이 고판례와 혼인하였고, 전라북도 정읍시 입암면 대흥리에 있는 차경석의 집을 포정소(布政所)로 정하였다. 1909년(순종 3) 강증산이 세상을 뜨자 차경석이 교통을 받아 교단을 꾸려나갔다. 1911년 고판례가 ‘선도교’란 이름으로 포교를 시작하였고, 차경석은 중심 역할을 하였다. 1914년 세간에서 교단을 형성할 정도로 급속도로 세가 불어나자 이들을 ‘태을교’ 또는 ‘선도교’로 불렀고, 특히 고판례 밑에서 교단 운영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차경석이 주도권을 잡고 활동하면서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같은 해 5월 조선 독립과 황제 등극 사상 문제로 차경석이 구금되었다가 9일 만에 석방되었다.

1918년 10월, 차경석보천교 신도들과 함께 일제에 맞서 무장투쟁과 항일운동을 모의한 제주도 법정사 항일운동을 일으켰다. 1919년 60방주 조직 이후 교인의 수는 최소 100만 명에서 최대 600만 명에 이르렀다. 1921년 1월~8월까지 보천교 교인을 대상으로 한 대규모 검거 선풍이 일어나 보천교인 1,000여 명이 체포되었다. 1921년 9월 23일 함양 황석산에서 2차 고천제를 올리고, 국호(國號)를 시국(時國)이라 하고 교명(敎名)을 보화(普化)라고 하였다. 1922년 서울시 종로구 창신동에 보천교라는 간판을 걸게 되면서 보천교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922년 5월 15일 십일전(十一殿)을 낙성하고 1929년 3월 15일에 완공하였다. 한편, 1923년 ‘시국대동단’을 조직하여 전국적으로 대동아 단결을 선전하는 친일 활동을 하였다. 이 단체 취지는 보천교의 교리적 측면을 고려하였지만 일제의 ‘대동아공영’과 유사하다는 비판이 있었다. 1936년 윤3월 10일 교주 차경석이 사망함으로써 보천교는 해체되었다.

보천교가 쇠락한 이유는 여러 가지인데, 교리적인 한계와 한시적인 천자 등극설, 그리고 일제의 교묘하고도 집요한 탄압 등이 작용하였다. 1945년 11월 3일 김구는 여의도 공항에서 “우리가 정읍에 빚을 많이 졌다.”는 발언을 하였다. 이는 전라북도 정읍시 입암면 대흥리에 본소를 두었던 보천교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았다는 의미였다고 한다. 1925년 시국대동단이 결성되기 전까지 보천교는 사실상 임시정부의 독립 관련 활동을 지속적으로 지원하였다. 그러나 당시 조선총독부와 결탁한 언론과 일부 친일 사회 지도층에 의해 왜곡 및 거짓 정보에 농락당한 나머지 보천교에 대한 세간과 대중의 이미지는 지금까지도 부정적이고 회의적인 대상으로 남아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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