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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801157
한자 懺堂庵
영어음역 Chamdangam
영어의미역 Chamdangam Temple
이칭/별칭 대참사(大懺寺)
분야 종교/불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기관 단체/사찰
지역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삼인리 605[도솔길 194-77]지도보기
시대 고대/삼국 시대/신라
집필자 배옥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사찰
건립연도/일시 신라 시대
창건자 의운화상 개창
전화 063-563-3440

[정의]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삼인리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 선운사 소속 암자.

[개설]

참당암은 고창 선운산의 여러 사찰과 암자 가운데 가장 먼저 건립된 사찰이다. 창건 연대는 신라 시대로, 지금은 선운사의 산내 암자로 사격(寺格)이 위축되었으나 본래는 거찰이었다. 신라 시대의 의운화상이 개창한 도량이다.

참당암은 송사현[현 무장면] 남쪽에 산이 있어 고성이라 하였고, 기괴하고 빼어남을 모아 서로 뻗고 북으로 달려 오십 리에 이르러 별처럼 벌려 있으며, 바둑알처럼 널려 있는 곳이 도솔산이다. 여러 봉우리와 빼어난 경색이 겹겹이 둘러 있어 수십 리 통천(洞天)을 이루었다.

소요산 중에 음성이라는 재가 있는데, 꾸불꾸불 길게 달려 지네가 신음하는 형상 같고, 그 서쪽의 깊숙한 골짜기가 궁벽하면서도 평탄하여 하늘이 감추고 땅이 숨긴 호중(壺中) 별천지를 방불케 한다. 동쪽은 승당(僧堂)이고 서쪽에는 미륵전이 있는데, 사문을 모아 경문을 설한다. 위는 약사전이고, 아래는 명부전이며, 서역의 진상(眞像)을 받들었다.

남쪽에는 천왕봉이 있고, 괴이한 돌과 깎아지른 듯한 바위가 우뚝한 참당사와 가까운 곳에 안산이 있으며, 서쪽에는 국사봉이 있어 언덕지고 저습하며, 계곡을 이룬 곳을 내려다보며 에워싼 곳은 참당암의 도장이다. 높은 바위와 깊은 골짜기는 수도승의 수도의 장이며, 일수(一水), 일산(一山), 천만의 기이한 경관이 갖추어 있어 형상할 수 없는 것은 대참사의 승경이다.

서남쪽으로 가면 도솔암이라는 암자가 있다. 서쪽 면에 층층 바위를 배치하여 병풍을 두르고 돌사다리 암벽을 따라 수풀을 부여잡고 있으며, 우물을 지나 올라가면 짧은 서까래와 낮은 처마가 절정에 이르는 듯하다. 동쪽 모퉁이에서 가파르게 매달려 있는 언덕을 밟고 몇 걸음 옮기면, 상층에 반석이 스스로 이루어져 평탄하면서도 수백 사람이 앉을 만한 곳이 만월대이다. 후세에 일곱 소나무가 있는 것이라 하여 칠송대라 했다.

칠송대 아래에 천길 돌을 깎아 가운데 구멍을 파 철주를 끼워넣었는데 부러져서 매달릴 곳이 없는 것은 옛 층사는 없어지고 미륵존상만이 석면에 엄연할 뿐이다. 그 서쪽 법화굴은 의운화상이 살던 곳이고, 남쪽 열석굴은 신라 진흥왕이 왕위를 물려주고 와서 묵던 곳인데, 꿈에 세 부처가 돌을 가르고 나오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그러한 이름 붙여졌다. 암자 뒤가 천왕봉이고, 천왕봉 좌우에 천상굴, 고왕굴이 있으며, 봉의 가장 놓은 곳에 개심사가 있고, 봉의 서북에 운령사가 있다.

[건립경위 및 변천]

우리나라 사찰 대다수가 거란과 몽고의 침입과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 많은 전란으로 인하여 불타 없어지게 되면서 가람의 창건이나, 중건 중수 등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문헌 자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참당암의 경우에도 예외가 아니다. 본사인 선운사에 전해오는 기록 가운데 임진왜란 이전의 것은 남아 있지 않고, 조선 후기에 와서 1707년(숙종 33)에 기록된 「도솔산선운사창수승적기(兜率山禪雲寺創修勝蹟記)」와 1794년(정조 18)에 기술된 『참당사사적기(懺堂寺事蹟記)』, 1850년(철종 1)의 「도솔산참당사여선운사국내주회기록(兜率山懺堂寺與禪雲寺局內周回記錄)」 등의 문헌만이 남아 있다.

이와 같은 소수의 사료 가운데 『참당사사적기』는 선운사의 창건에 관한 기록을 담고 있어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책의 앞부분에는 1794년에 임우상(林雨相)이 기술한 「대참사고사(大懺寺故事)」와 「참당사법당기(懺堂寺法堂記)」가 실려 있다. 이어서 1713년(숙종 39)에 호월자 현익대사가 기술한 「대참사사적기(大懺寺事蹟記)」가 함께 병서되어 있는데, 이는 현익대사의 기록보다 300여 년 전의 기록을 옮겨 쓴 것이다.

위의 문헌을 근간으로 하고 조선 중종 때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 18세기 간행된 『여지도서(輿地圖書)』, 『가람고(伽藍考)』, 『범우고(梵宇考)』 등의 기록을 참고하여 대참사의 연혁을 살펴보고자 한다. 참당암의 창건 시기는 신라 시대로, 지금은 선운사의 산내 암자로 사격(寺格)이 위축되었으나 본래는 거찰이었으며, 현재 남아 있는 선운산의 여러 사찰 가운데 가장 일찍 창건되었다. 『참당사사적기』에 실린 현익대사의 「대참사사적기」에는 “송사현(松沙縣) 북쪽 선운산의 서쪽에 있는 대참사는 신라 때 의운화상이 개창한 도량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창건 설화가 실려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산에는 동쪽 고개 위에 수십 인이 앉을 만한 평평한 암반이 있고, 그 밑에는 백여 명이 들어 있을 만한 고왕굴(高王窟)이 있다. 그 앞 층암을 오르면 정상에서 해악(海嶽)이 한눈에 전망되는데, 여기에 천상굴(天上窟)이 있으며, 그 남쪽에는 수백 보 거리 촉석이 둘러 있는 곳에는 이무기가 살고 있었던 용담인 아뇩지가 있다. 또 여기에 도솔당(兜率堂)이 있는데, 좌대와 같이 넓은 대암과 병풍을 깎아 세운 듯한 암벽이 사면을 두른 가운데에 학이 깃들고 용이 머문 듯하면서 송풍라월의 기이한 형관이 형용할 수 없다. 도솔암의 좌편에 열석굴이 있다. 신라 왕이 왕위를 피하여 이 산 좌변의 굴에서 수도하고 있는데 꿈에 미륵삼존이 삼석을 깨치고 출현하는 것을 보고 드디어 여기에 사찰을 세우도록 현기(玄機)를 내림으로써 중애사(重愛寺), 선운사도솔암 등의 사암이 이때 창건되었다”라 적고 있다.

같은 책에 있는 임우상의 「대참사고사」는 내용이 거의 같으나 창건 당시 참당사의 모습을 훨씬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대참사에는 동에 승당(僧堂)이 있고, 서에 미륵전(彌勒殿)이 있어 여기에 사문들이 모여서 설강을 하며, 위에 약사전이 있고 아래에 명부전이 있는데 여기에 서역 금인에게서 받은 불상을 봉안하였다. 이 절 서쪽으로 도솔암이 있는데 층암절벽이 둘러 있고 이 옆에 매달린 듯한 절벽을 기어 올라가면 그 위에 수백 명이 앉을 만한 평탄한 암반이 있으니, 이것이 만월대(滿月臺), 또는 칠송대(七松臺)라는 것이다. 서령의 협곡에 참당사가 있는데, 이 또한 의운국사의 도량이다”라고 적고 있다.

물론 위의 기록을 그대로 믿기에는 몇 가지 문제점이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이 창건된 대참사는 처음부터 상당한 규모를 갖추었지만 이후 통일신라와 고려를 거치면서 사세(寺勢)가 여러 차례 부침을 거듭하였으며, 간신히 사찰의 명맥만을 유지하였다. 이는 당시의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대참사사적기」에 신라의 창건으로부터 80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대웅보전이 세 번이나 넝쿨 속에 들었는데도 약사존상이 훼손되지 않았고, 여러 차례 전란을 겪었는데도 이제까지 보인(寶印)과 화엄(華嚴), 아주(牙籌), 생회대중(栍會大衆)과 유나(維那), 찰중(察衆)의 금석문이 완전히 유통되었다고 기록된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고려 후기에 이르러 참당사는 큰 부흥을 맞게 된다. 임우상의 「대참사법당기」에는 1329년(충숙왕 6)에 대웅전을 중수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생회중목(栍會衆目)」에는 1346년(충목왕 3)부터 1398년(태조 7)에 이르는 기간 동안에 행한 43회의 생회에 참석한 대중의 목록이 기록된 것으로 미루어보아, 이 시기에는 사찰의 규모도 컸고, 법회도 활발하였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활동사항]

신라승 의운화상은 우진국의 왕인 금인(金人)이다. 참당암 동쪽에는 승당을 두고 서쪽에는 미륵전을 두어 승려들에게 경을 설할 수 있게 하였고, 위쪽에는 약사전을, 아래에는 명부전을 두어 서역의 진상을 모셨다. 이곳에 승려가 절을 지었고 진흥왕이 시주하였으며, 용담 위에 터를 잡아 나한을 모셨다. 참당암 창건 이후의 역사는 전하지 않는데, 1328년(충숙왕 15)부터 이듬해까지 중수가 있었으며, 1346년(충목왕 2)부터 1398년(태조 7)까지 약 52년에 걸쳐 점찰신앙(点察信仰) 법회가 개설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여러 차례의 중건이 있었는데, 1530년(중종 25)에 재중수하였고, 이어 1614년(광해군 6), 병자호란 뒤인 1642년(인조 20), 1794년(정조 18) 등 4차례에 걸친 중수가 있었다. 당시에는 법당 동쪽에 승당, 서쪽에 미륵전, 위로는 약사전, 아래로는 명부전 등 여러 전각을 갖추어 조선 후기까지만 해도 독립된 사찰로서 번성하였으나, 성종대(1469~1494) 이후 선운사가 산중의 중심 도량이 되면서 상대적으로 차츰 사세가 약화되었다. 현재 참당암의 전각은 대웅전과 약사전(藥師殿), 응진전(應眞殿), 명부전(冥府殿), 도솔선원, 요사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현황]

선운사 참당암 대웅전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3칸이며, 매 칸마다 4분합문을 달았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고,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짠 다포 양식의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다.

옆면에 짜인 공포는 전형적인 18세기 다포 양식인 반면 뒷면의 공포는 굽 면이 석가여래를 본존으로 관음보살과 세지보살이 협시한 삼존불을 봉안하고 있으며, 1900년에 후불탱화로서 「영산회상도」를 조성하였다. 이 건물은 여러 차례의 중수가 있었음에도 여전히 고려 시대 건축 부재의 양식을 지니고 있어 이채로우며 조선 후기의 빼어난 건축미를 지니고 있다.

[관련문화재]

선운사 참당암 대웅전은 보물 제803호이며, 약사전에 봉안되어 있는 선운사 약사여래불상은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33호이고, 참당암 동종은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36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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