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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801152
한자 大韓佛敎彌勒宗
영어음역 Daehan Bulgyo Mireukjong
영어의미역 Korean Buddhist School of Maitreya
분야 종교/신종교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전라북도 고창군 성송면 하고리 268[남창2길 31-51]지도보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안후상

[정의]

전라북도 고창군 성송면 하고리에 있는 신종교.

[개설]

대한불교 미륵종전라북도 고창군 성송면에 본부를 두고 있는 증산교 계통의 신종교 단체이나, 현재는 대한불교 미륵종으로 등록하여 불교를 표방하고 있다.

[변천]

1. 김계주의 무을교 창도

전라남도 나주군 반남면 신촌에서 태어난 김계주(金桂朱)[1896~1950]는 원래 보천교인으로서, 광주 무등산에서 추종자들과 함께 수도 생활을 하였다. 이어 옛 전라남도 광산군 서창면 풍암리 운리동으로 옮겨 정진하던 중에 강증산(姜甑山)으로부터 ‘무(戊)’자를 계시 받았다고 한다. 이때가 1942년 9월 9일이다. 이후로 김계주는 자신의 도를 ‘무교(戊敎)’라 이름하고, 운리동에 교단 본부를 차려 본격적인 포교 활동을 시작하였다.

치병(治病)과 예언을 중심으로 포교를 하던 김계주는 일제의 탄압으로 숨어 있다가, 광복 직후인 1946년에 교명을 무을교(戊乙敎)라 표명하면서 포교를 재개하였다. 1950년 봄에는 교인들에게 곧 전쟁이 일어날 것과 자신의 죽음을 예언하였다고 한다. 1950년 9월 자신의 예언대로 김계주는 좌익으로부터 죽음을 당하였다.

2. 김홍현과 대한불교 미륵종

1959년에 김계주의 뒤를 이어 대표가 된 김홍현(金洪玄)은 김계주와 마찬가지로 치병과 예언을 중심으로 포교 활동을 하였다. 무을교는 1964년 10월에 「불교재산관리법」에 의거하여 ‘대한불교 미륵종 중앙포교원’으로 당국에 등록하였다. 김홍현은 1970년에 그의 고향인 전라북도 고창군 성송면 하고리의 약 4,000㎡의 대지에 도덕궁(道德宮)과 무을궁(戊乙宮) 등 5개 동의 성전을 신축하고, 교단 본부를 옮겼다.

1977년 12월에 교명을 ‘대한불교 미륵종(大韓佛敎彌勒宗)’으로 개칭하면서 증산계의 무을교가 불교계의 한 종단으로 변경되었다. 이와 더불어 본존상도 미륵불로, 그리고 근본 경전도 ‘미륵상생경(彌勒上生經)’과 ‘미륵하생경(彌勒下生經)’ 등으로 바꾸었다. 주요 행사도 음력 4월 보름날의 ‘득법회행법회(得法廻行法會)’와 9월 19일의 ‘미륵불예공법회(彌勒佛禮供法會)’ 등으로 변경하였다. 종단의 조직 체계 역시 여느 불교 종단과 마찬가지로 종정을 종무 집행의 최고 책임자로 하고, 집행 기구로 종의원과 의결 기관인 중앙 종회 등을 두었다.

1985년에 세운 천탑인 ‘미륵후천통세비(彌勒後天統世碑)’라는 비는 미륵불인 강증산을 상징한다고 한다. 따라서 대한불교 미륵종은 미륵으로서의 강증산 신앙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1989년 김홍현의 타계한 이후로는 증산계와의 유대를 소홀히 하고 있다. 김홍현의 타계 이후에 교단의 대표가 김민호, 김태근 등으로 이어지면서 불교 종단화가 가속화 되었다. 현재는 교세가 많이 침체되어, 있으며 활동 역시 거의 없는 상태이다.

[신앙 형태]

무을교 시절의 신앙 대상은 강증산과 여처자, 그리고 미래에 올 구원자, 이렇게 3존이었다. 주변에는 진묵대사와 강증산의 부인인 고사모, 김일부(金一夫) 등의 위패가 안치되어 있다. 그러나 김홍현이 고창으로 교단 본부를 옮기면서 미륵불[강증산] 단일 신앙 형태로 바꾸었으며 미륵불 좌우로는 김계주상(金桂朱像)과 여처자상(余處子像)을 안치했다. 이처럼 대한불교 미륵종으로 개칭한 이후에도 여전히 증산 신앙을 이어가고 있으며, 치병과 예언을 중심으로 하는 포교 활동도 전개하였다. 도덕(道德), 인의(仁義) 등 13계문을 잘 지키고 수련에 집중하면 무병장수할 뿐만 아니라 신선이 될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현황]

1997년 기준 전체 교도 수 15여만 명에 교당 수가 127개소에 이른다고 주장하나, 2010년 현재의 침체된 교세로 볼 때 적지 않은 차이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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