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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800862
한자 全琫準
영어음역 Jeon Bongjun
이칭/별칭 명숙(明淑),해몽(海夢),녹두(綠豆),녹두장군(綠豆將軍)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죽림리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문병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동학 접주|동학 농민 혁명 지도자
출신지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죽림리지도보기
성별
생년 1855년연표보기
몰년 1895년연표보기
본관 천안

[정의]

개항기 고창 출신의 동학 접주이자 동학 농민 혁명 지도자.

[개설]

본관은 천안(天安)이며, 자는 명숙(明淑), 호는 해몽(海夢)이다. 몸이 왜소하여 흔히 녹두(綠豆)라 불렸는데, 이 때문에 뒷날 녹두장군(綠豆將軍)이란 별명이 생겼다. 출생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1855년 지금의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죽림리에서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활동사항]

전봉준은 어려서 전주 구미리[현 전라북도 완주군 봉동읍]로 옮겨 살다가 아버지를 따라 태인현 감산면 계봉리[현 전라북도 정읍시 감곡면 계봉리] 항새마을로 이사했다. 이곳에서 전봉준은 10리 근처 금구 원평에 사는 10년 연상의 김덕명(金德明)과 교류하며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후일 금구 원평의 대접주(大接主)가 된 김덕명으로부터 정신적·물적 지원을 받게 된다.

10대 후반 전봉준은 태인 산외면 동곡리 지금실[현 전라북도 정읍시 산외면 동곡리]로 옮겨 살았다. 이곳에서 그는 혁명 동지 김개남(金開南)과 교류하며 친분을 쌓았다. 그리고 고부 농민 봉기가 일어나기 몇 해 전 고부군 궁동면[현 전라북도 정읍시 이평면] 양간다리로 이사했다가 같은 면의 조소리[현 전봉준 고택]로 주거지를 옮겼다. 가족은 전처와 후처와의 사이에서 2남2녀를 두었다. 그가 훗날 진술한 기록에 의하면, 그는 동학 농민 혁명이 일어나기 전에는 농업을 전업으로 한 농민이 아니라 훈장일도 하며 약간의 농사를 짓고 사는 향촌 지식인이었다.

농민 봉기의 불씨가 된 것은 고부군수 조병갑(趙秉甲)의 탐학에서 비롯되었다. 조병갑은 영의정 조두순(趙斗淳)의 서질(庶姪)[형제의 조카]로서 여러 주·군을 돌아다니며 가렴주구(苛斂誅求)를 일삼아 농민들의 원성을 사고 있었다. 1892년 고부군수로 부임한 후 조병갑은 농민들에게서 여러 가지 명목으로 과중한 세금과 재물을 빼앗는 등 탐학과 비행을 자행하였다.

한재(旱災)가 들어도 면세해 주지 않고 도리어 국세의 3배나 징수하였고, 부농을 잡아다가 불효·음행·잡기·불목(不睦)[사이가 좋지 않음] 등의 죄명을 씌워 재물을 약탈하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만석보(萬石洑)의 개수에 따른 탐학으로 큰 물의를 일으켰다.

1893년 12월, 농민들은 동학 접주 전봉준을 장두(狀頭)[여러 사람이 서명한 소장의 첫머리에 이름을 적는 사람]로 삼아 관아에 가서 조병갑에게 진정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쫓겨나고 말았다. 이에 전봉준은 동지 20명을 규합하여 사발통문(沙鉢通文)을 작성하고 거사할 것을 맹약, 드디어 이듬해인 1894년 1월 10일 1만여 명의 동학 농민군을 이끌고 봉기하였다. 이것이 고부 민란이었다. 동학 농민군이 고부관아를 습격하자 조병갑은 전주로 도망갔다. 이에 고부읍을 점령한 동학 농민군은 무기고를 파괴하여 무장하고, 불법으로 빼앗겼던 세곡(稅穀)을 창고에서 꺼내 농민들에게 돌려주었다.

이 보고에 접한 정부는 조병갑 등 부패 무능한 관리를 처벌하고, 새로 장흥부사 이용태(李容泰)를 안핵사로 삼고, 용안현감 박원명(朴源明)을 고부군수로 임명하여 사태를 조사, 수습하도록 하였다. 그동안 자연 발생적으로 고부 민란에 참여했던 농민들은 대개 집으로 돌아가고, 전봉준의 주력 부대는 백산(白山)으로 이동, 주둔하고 있었다.

그런데 안핵사로 내려온 이용태가 사태의 모든 책임을 동학 교도들에게 돌려 체포와 분탕, 살해를 일삼는 등 악랄한 행동을 자행하였다. 전봉준은 이에 격분하여 1894년 3월 하순, 인근 각지의 동학 접주들게 통문을 보내 보국안민(輔國安民)을 위하여 봉기할 것을 호소하였다. 이에 따라 백산에 집결한 동학 농민군의 수는 1만 명이 넘었는데, 여기에서 전봉준은 동도대장(東徒大將)으로 추대된 뒤 손화중(孫和中)·김개남을 총관령(總管領)으로 삼았다. 그리고 4개 항의 행동 강령을 내걸고 창의(倡義)의 뜻을 밝혔으며, 또한 격문을 작성한 뒤 통문으로 각처에 보내 농민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요청하였다. 이로써 민란은 동학 농민 혁명으로 전환되었다.

1894년 4월 4일,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 농민군은 부안을 점령하고, 전주를 향하여 진격 중 황토현(黃土峴)에서 영군(營軍)을 대파하고, 이어서 정읍·흥덕·고창을 석권한 뒤 파죽지세로 무장에 진입하여 완전히 장악하였다. 여기에서 전봉준은 창의문을 발표하여 동학 농민군이 봉기하게 된 뜻을 재천명하였고, 4월 12일에서 4월 17일 사이에는 영광·함평·무안 일대에 진격하고, 4월 24일에 장성을 출발, 4월 27일에는 전주성을 점령하였다.

한편, 이보다 앞서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 홍계훈(洪啓薰)은 정부에 외병(外兵)의 차입(借入)을 요청하였다. 결국 정부의 원병 요청으로 청나라 군인들이 인천에 상륙하고 일본군도 톈진조약[天津條約]을 빙자하여 조선으로 들어왔다. 전봉준은 국가의 운명이 위태로워지자 홍계훈의 선무(宣撫)[흥분된 민심을 어루만져 가라앉힘]에 일단 응하기로 하고 「폐정개혁안(弊政改革案)」을 내놓았는데, 이를 홍계훈이 받아들임으로써 양자 사이에는 5월 7일 이른바 전주화약(全州和約)이 성립되었다. 그리고 전라도 각 지방에는 집강소(執綱所)를 두어 폐정의 개혁을 위한 행정 관청의 구실을 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청일전쟁이 일어나면서 사태는 또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마침내 9월 중순을 전후하여 동학 농민군은 항일 구국의 기치 아래 다시 봉기하였다. 여기에 전봉준 휘하의 10만여 남접 농민군과 최시형(崔時亨)을 받들고 있던 손병희(孫秉熙) 휘하의 10만 북접 농민군이 합세하여 논산에 집결하였다.

전봉준은 자신의 주력 부대 1만여 명을 이끌고 공주를 공격하였으나 몇 차례의 전투를 거쳐 11월 초 우금치 전투에서 대패하였다. 나머지 농민군도 금구 싸움을 마지막으로 일본군과 정부군에게 진압되고 말았다. 그 뒤 전라도 순천 및 황해도와 강원도에서 일부 동학 농민군이 봉기하였으나 모두 진압되었다. 이후 전봉준은 후퇴하여 금구 원평을 거쳐 정읍으로 피신했다가 순창에서 부하였던 김경천(金敬天)의 밀고로 12월 2일 체포된 뒤 일본군에게 넘겨져 서울로 압송되었다.

전봉준은 다음해 2월 9일, 2월 11일, 2월 19일, 3월 7일, 3월 10일 5차에 걸쳐 일본 영사의 심문을 받고, 3월 30일 손화중·최경선(崔景善)·김덕명·성두환(成斗煥)과 함께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때 그의 나이는 41세였다. 전봉준은 법정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나는 바른 길을 걷고 죽는 사람이다. 그런데 반역죄를 적용한다면 천고에 유감이다.”라고 개탄했다. 전봉준은 죽음에 임하여 다음과 같은 유시(遺詩)를 남겼다.

시래천지개동력(時來天地皆同力)[때가 오니 천하가 모두 힘을 같이 했건만]

운거영웅불자모(運去英雄不自謀)[운이 다하니 영웅도 스스로 도모할 수가 없구나]

애민정의아무실(愛民正義我無失)[백성을 사랑하는 올바름일 뿐 나에게는 과실이 없나니]

위국단심수유지(爲國丹心誰有知)[나라를 위하는 오직 한마음 그 누가 알리]

[상훈과 추모]

1954년 천안전씨 문중에서 이평면 조소리에 사적비를 세웠으며, 1981년 한국청년회의소에서 전주에 있는 덕진공원에 추모비를 세웠다. 고창군 고창읍 죽림리 63번지에 전봉준 생가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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