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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800791
한자 慈藏律師
영어음역 Jajangyulsa
영어의미역 Master Jajangyulsa
이칭/별칭 선종랑(善宗郞)
분야 종교/불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종교인
지역 전라북도 고창군 고수면 은사리 산 190-1지도보기
시대 고대/삼국 시대
집필자 배옥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승려
성별

[정의]

신라 시대 문수사를 창건한 승려.

[개설]

자장율사(慈藏律師)의 생애를 알게 해 주는 주요한 문헌으로는 『당고승전(唐高僧傳)』과 『삼국유사(三國遺事)』가 있다. 『당고승전』에 수록되어 있는 「자장전(慈藏傳)」은 자장이 생존해 있던 645년(선덕왕 4)에 지어진 것으로서 당나라에서의 자장의 활동을 상세하게 적고 있다.

『삼국유사』에는 「자장정율(慈藏定律)」, 「황룡사구층탑(黃龍寺九層塔)」, 「대산오만진신(臺山五萬眞身)」 등에 자장에 관한 기록이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일연(一然)이 「자장본전(慈藏本傳)」, 「별전(別傳)」, 「향전(鄕傳)」, 『당고승전』, 「황룡사기(黃龍寺記)」, 「오대산본전(五臺山本傳)」 등을 참고하여 엮은 것이다. 이 밖에도 『삼국유사』의 편찬 시기와 거의 같은 시기인 1307년(충렬왕 33)에 민지(閔漬)가 지은 「봉안사리개건사암제일조사전(奉安舍利開建寺庵第一祖師傳)」이 전해지고 있다.

[활동사항]

자장율사의 아버지 김무림(金茂林)은 진골(眞骨)로서 신라 17관등 중 제3위에 해당하는 소판(蘇判)의 높은 관직에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늦게까지 자식이 없었다. 이에 그는 불교에 귀의하여 “만일 아들을 낳으면 시주하여 법해(法海)의 진량(津梁)이 되게 하겠습니다.”라고 축원하면서 천수관음(千手觀音)을 조성하여 자식 낳기를 빌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아내가 문득 별이 떨어져 품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임신을 하여 아들을 낳으니, 이름을 선종랑(善宗郞)이라 하였다. 그가 태어난 날이 석가모니가 탄생한 4월 8일이란 것만 알 뿐, 정확한 출생 연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선종랑, 즉 자장은 천품이 맑고 슬기로웠으며, 문사(文思)가 날로 풍부해지면서 세속에 물들지 않았다. 일찍이 어버이를 여읜 그는 세속의 번거로움을 싫어하여 처자를 버리고 전원(田園)을 희사하여 원녕사(元寧寺)를 만들었다. 그 후 그는 홀로 깊고 험한 산골짜기를 찾아들어 맹수들도 두려워하지 않고 고골관(枯骨觀)을 닦았다. 고골관이란 앙상하게 뼈만 남기고 썩어 버리는 시체의 모습을 생각함으로써 인생의 무상(無常)함을 깨닫고 진리를 터득하고자 하는 수행 방법이다.

간혹 권태롭고 피곤할 때가 없지도 않았으나 그는 조그만 집을 지어 가시덤불로 둘러막고 벗은 몸으로 그 속에 앉아 조금이라도 움직이기만 하면 곧 가시에 찔리도록 가시를 둘러쳐 놓고 앉아 수행을 하였으며, 끈으로 머리를 천장에 매달아 조금이라도 수행 중 졸거나 하면 머리카락이 당겨져서 바로 깰 수 있도록 하여 정신이 잠시도 혼미함에 떨어지지 않도록 하였다.

자장이 이와 같이 피나는 정진을 계속하고 있을 때, 조정에서는 재상 자리가 비어 그를 불렀다. 문벌로 보아 자장이 그 자리에 가장 적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장은 그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왕은 마침내 바로 취임하지 않으면 목을 베라고 엄명을 내렸다. 그러나 자장은 칙명을 듣고 나서, “내가 차라리 계(戒)를 지키고 하루를 살지언정, 계를 깨뜨리고 백 년을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이 말을 전해들은 왕은 결국 그의 출가를 허락하였다. 이에 자장은 산속 깊이 숨어 들었다. 한 톨의 양식도 없었다. 그때 이상한 새가 과일을 물고 와서 자장에게 공양하였다. 자장이 그것을 먹고는 깜빡 잠이 들었는데, 천인(天人)이 와서 그에게 오계(五戒)를 주는 꿈을 너무도 선명하게 꾸게 되었다. 그제야 자장은 깊은 산골짜기로부터 나왔다. 그러자 각처의 남녀들이 그에게로 다투어 와서 계를 받았다. 이때부터 그의 이름은 널리 알려졌지만, 그럴수록 그는 당나라로 가서 보다 더 깊이 공부하고 싶은 구도심(求道心)에 사로잡혔다.

636년(선덕왕 5) 마침내 자장은 승실(僧實) 등 제자 10여 명과 함께 칙령(勅令)을 받아 당나라로 떠났다. 당나라로 들어간 자장은 먼저 문수보살이 머문다는 성지(聖地) 청량산(淸涼山)으로 갔다. 그러고는 문수보살의 소상(塑像) 앞에 엎드려 감응(感應)을 기도한 뒤 문수보살의 현신(現身)으로부터 감응을 받고 당나라 서울 장안(長安)으로 향했다.

당나라 태종은 사신을 보내어 그를 위로하고 승광별원(勝光別院)에 머물게 하였으며, 후한 대접으로 불편을 없게 해 주었다. 그가 승광별원에 머물고 있던 어느 날 그를 찾아온 한 장님이 그의 설법을 듣고 참회하던 중 눈을 뜨게 되는 일이 있었다. 이러한 소문이 빠른 시간에 널리 퍼지게 되면서 자장을 찾아와 계를 구하는 사람이 매일 수천 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자장은 이렇게 번거로운 생활이나 후한 대접을 받으면서 나날을 보내기보다는 더 많은 곳을 편력하며 수행하고자 하는 생각을 하였다.

자장은 태종에게 글을 올리고 승광별원을 떠나, 장안의 남쪽 50리쯤에 있는 종남산(終南山) 운제사(雲際寺)의 동쪽 산록으로 들어갔다. 그는 그곳에서 바위에 의지하여 집을 짓고 살았다. 당시 종남산에는 많은 절이 있었다. 특히 지상사(至相寺)에는 중국 화엄종의 초조(初祖) 두순(杜順)[557~640]이 있었고, 풍덕사(豐德寺)에는 훗날 남산종(南山宗)이란 계율종(戒律宗)의 한 종파를 열게 되는 도선율사(道宣律師)가 있었다.

643년(선덕왕 12) 신라에서 왕이 태종에게 글을 보내어 자장을 돌려보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신라 조정의 이 같은 동기는 당시 통일 전야의 어려운 국내 사정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선덕왕 7년에는 고구려의 군사가 신라의 칠중성(七重城)을 공격해 왔고, 9년에는 당시 신라의 정신적 기둥이었던 원광법사(圓光法師)가 타계하였다. 특히 11년 7월에 백제에게 40여 성을 빼앗기고 다음 달에는 백제와 고구려의 연합군에게 당항성(黨項城)을 빼앗겼으며, 백제에게 대야성(大耶城)을 함락당하는 등 신라로서는 매우 위급한 상황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자장은 이때 신라에 불상과 불경 등이 미비함을 태종에게 말하여 『대장경(大藏經)』 한 질과 번당(幡幢)·화개(華蓋) 등을 골고루 갖추어 귀국하였다. 신라를 떠난 지 7년 만의 귀국이었다. 그리고 우연히 고창의 문수사를 지나다가 산세와 수세가 중국의 청량산과 너무도 흡사하여 기이하게 여겨 문수산 기슭의 암굴을 찾아 7일 기도를 올렸는데, 그때 문수보살이 땅 속에서 솟아나는 꿈을 꾸게 되어 그 곳을 파 보니 화강석의 장대한 문수보살 입상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지금의 전라북도 고창군 고수면 은사리 산190-1번지에 절을 세우고 문수사라 이름 하고, 취령산을 문수산 혹은 청량산으로 불렀다.

귀국 후 자장의 활동은 호국적인 것만이 아니라 그의 활동에서 보다 중요한 것은 불교의 홍통(弘通)을 통한 국민 교화와 불교 교단의 기강 확립이었다. 특히 왕은 그를 분황사(芬皇寺)에 머물러 있게 하고 대국통(大國統)의 높은 벼슬을 내리는 등 대우를 두터이 하였다. 이때 황룡사 구층탑을 세우게 된 동기는 불력(佛力)에 의해 나라를 지킨다는 소박한 신앙심만이 아니라, 신라의 서울 경주에 거대한 탑을 세움으로써 왕실의 권위와 신라의 국력을 과시하고자 한 현실적인 필요성에 그 비중이 더 많았다.

그는 어느 해 여름 궁중에서 대승론(大乘論)을 강하기도 하고, 황룡사에서 7일 동안 『보살계본(菩薩戒本)』을 강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 신라 불교계는 기강이 세워져 있지 못했다. 조정에서 자장에게 대국통이라는 상직(常職)이 아닌 높은 직위를 주었던 것은 그로 하여금 전국의 승려들을 관장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대국통이 된 자장은 전국의 모든 승려들에게 불경을 공부하게 하여 매년 봄가을 두 차례에 걸쳐 시험을 보도록 하였다. 또한 그는 한 달에 여러 번 계를 설하게 하며, 전국에 순검사(巡檢使)를 파견하여 지방 사찰을 일일이 살펴 승려들의 과실을 징계하고 불경과 불상 등을 정중히 모시도록 하는 등 교단의 기강을 바로잡는 데 전력하였다. 자장은 만년에 서울 경주를 떠나 강릉에 수다사(水多寺)를 세우고 거기에 거처하기도 하고, 오대산에 월정사(月精寺)를 세우기도 하였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 『제경계소(諸經戒疏)』 10여 권과 『출관행법(出觀行法)』 1권, 『사분율갈마사기(四分律羯磨私記)』 및 『아미타경의기(阿彌陀經義記)』 등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 전하는 것은 없다.

[상훈과 추모]

문수사에 비가 세워져 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8.08.29 단순오탈자 수정 함게 -> 함께
이용자 의견
최** 활동사항중 끝 부분에. 자장은 만년에 서울 경주를 떠나에서 만년은 어떠한 표현인지요. 호기 말년?
  • 답변
  • 디지털고창문화대전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귀하께서 문의하신 '만년(晩年)'은 '나이가 들어 늙어가는 시기'를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앞으로도 지속적인 관심과 이용 부탁드립니다.
2017.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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