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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800781
한자 金慶奎
영어음역 Gim Gyeonggyu
이칭/별칭 덕여(德輿),우졸재(愚拙齋)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전라북도 고창군 흥덕면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박노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유학자
출신지 전라북도 고창군 흥덕면
성별
생년 1807년연표보기
몰년 1876년연표보기
본관 경주

[정의]

조선 후기 고창 출신의 유학자.

[가계]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덕여(德輿), 호는 우졸재(愚拙齋). 김충한(金沖漢)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김노석(金魯錫)이다.

[활동사항]

김경규(金慶奎)는 5세 때인 1811년(순조 11) 집에서 『천자문(千字文)』을 배우고, 1813년(순조 13) 『자치통감(資治通鑑)』을 배웠으며, 다음해 시를 지어 어른들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1817년(순조 17) 고부군수가 백일장을 개최했을 때 시 1편을 지어 특상을 받고, 신동이란 소리를 들었다.

1825년(순조 25) 집에서 마련한 혼수 비용을 가지고 칠서(七書)를 구입하여 내장사에 들어가 읽었다. 1834년(순조 34) 봄 향시를 보러 갔다가 책방 앞을 지나던 중 『근사록(近思錄)』을 보고 응시 대금으로 그것을 산 뒤 집으로 돌아와 버렸다. 1837년(헌종 3) 「영동지(詠冬至)」라는 시를 지었고, 1839년(헌종 5) 순창 옥천의 창북(滄北) 심의복(沈宜復)의 문하에 나아가 수학하였다.

1839년(헌종 5) 봄 사방의 학자들이 부안의 내소사에 모여 『성리대전(性理大全)』을 강(講)하게 되었는데, 그 깊은 내용을 풀이하지 못하였다. 당시 진사 하봉(夏峰) 고대진(高大鎭)김경규가 근처의 절에 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와 1주일 동안 함께 대담하고 “큰 선비가 있으니 우리 유학에 다행한 일이다.”고 하였다.

1844년(헌종 10) 여름 희현당(希賢堂)에서 하과(夏科)에 「반하(半夏)」라는 시를 지어 당시의 관찰사 김경선(金景善)을 놀라게 하였다. 이후 여러 차례 지방 시험에서 우수한 시문을 지어 발탁되었고, 1848년(헌종 14) 제자들과 호락강설(湖洛講說)을 토론하고 「천명설(天命說)」 1편을 지었다.

1855년(철종 6) 봄에 진사가 되었고, 다음해 변산을 유람하면서 난초를 보고 「유란(幽蘭)」이란 시를 읊어 난초의 고고한 모습을 자신의 심정에 비겼다. 1858년(철종 9) 1월 관찰사 심경택(沈敬澤)이 학행으로 추천하자, 자신은 이름만 났지 실행이 부족하다 하고 사양하였다. 그 해 3월 달성에 가서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퇴계(退溪) 이황(李滉) 등의 유풍을 둘러보고, 당시 영남 학자들과 교유하며 이기의 원류를 찾고 도학의 실마리를 탐구하였다.

1860년(철종 11) 4월 건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자신은 백성을 다스릴 만한 능력이 없다 하고 나아가지 않으니, 그 해 8월 『규장전운(奎章全韻)』 1질이 하사되었다. 1862년(철종 13) 가을 서울의 북한산을 구경하면서 많은 시문을 지었다. 1866년(고종 6) 봄에 성균관에 머물러 있었는데, 그 해 9월 프랑스 함대가 침입하여 병인양요가 일어났다. 그때 선대의 『삼세사고(三世私稿)』를 꾸려 용인으로 피난했다가 도적을 만나 모두 빼앗기고 성균관으로 돌아왔다. 그 뒤 병인양요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면 김경규는 눈물만 흘렸다고 한다.

1868년(고종 5) 9월 궁궐 안에 있는 옥류천(玉流川)과 폭포를 구경하고 돌아와 뛰어난 시를 지으니 동료들이 감탄하였다. 1872년(고종 8) 조정에서 서원 철폐령을 내렸는데, 옥천서원(玉川書院)·죽수서원(竹樹書院)·고암서원(考巖書院) 등이 모두 포함되었다. 이에 김경규는, 이 세 서원은 김굉필, 조광조(趙光祖), 송시열(宋時烈)을 배향한 곳이라고 하여 개연히 일어나 서원의 철폐를 반대하는 소를 올렸으나 허사였고, 그로 인해 성균관에서 이름이 삭제되었다. 1876년(고종 13) 7월 26일 70세로 사망하였다.

[학문과 사상]

김경규는 어려서부터 학문에 정진하면서 과거 공부는 마음에 두지 않았다. 그는 경전에 전념하여 특히 『근사록』과 『성리대전(性理大全)』, 『논어(論語)』 등을 독실하게 연구했으며, 경전의 내용을 실천하려고 노력했다. 즉, “자신을 속이지 않는다[無自欺]”라든가, “혼자 있을 때 조심해야 한다[愼其獨]”는 유학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고 몸가짐이나 마음 씀을 항상 조신하게 했으니, 자신 자신을 단속하고 행동을 삼가는 군자였다.

그의 학문이 투철했음은 당시 사람들이 평한 말에서 짐작할 수 있다. “우졸이 토해내는 시구는 이학이 아님이 없다[愚拙吐詞無處非理學]”라든가, “그의 몸가짐은 큰 옥을 간수하듯 했고, 마음가짐은 소반 위에 물을 놓은 듯했다[持身如拱璧 操心如盤水]”는 것이 그것이다. 또 여러 차례 관직을 제수했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고, 다만 경향을 왕래하며 당시의 사림들과 교유하며 승지를 만나면 붓을 들어 시문으로 그의 회포를 표현하였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 『우졸재집(愚拙齋集)』 7권 3책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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