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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800504
한자 古文書
영어음역 Gomunseo
영어의미역 Ancient Document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북도 고창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백원철

[정의]

조선 시대부터 근대 개항기까지 전라북도 고창 지역을 소재로 전해온 문서.

[개설]

문서란 경우에 따라서 서책·서적을 뜻하기도 하였고, 추안(推案)·국안(鞫案) 등 재판 관계의 신문·진술 기록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또한 개인과 개인 간에 토지·노비·가옥의 매매, 재산의 상속, 전곡(錢穀)의 차용 시에 주고받는 글은 주로 문권(文券)·문계(文契)·문기(文記) 등을 썼으나, 흔히 땅문서·종문서·집문서 등 문서라고 칭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관부나 국가, 사인(私人) 사이에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주고받는 글은 모두 문서라고 통칭할 수 있다. 고문서란 공사(公私)의 문서로서 오래된 것을 말한다. 고창 지역에서 전해오는 고문서로는 노비 매매 문서 2건, 호구단자 6건, 산송(山訟) 관련 문서 2건, 기타 2건 등의 문건이 남아 있다.

[종류]

고창군은 조선 시대의 3현[고창, 무장, 흥덕]이 합쳐진 고을이다. 이 중 고문서는 주로 무장현(茂長縣) 관내에서 발급된 것이 10여 건에 이른다.

1. 노비 매매 문서[2건]

1) 1700년(숙종 26) 4월 무장현에서 오정훈(吳鼎勳)에게 발급한 사급입안(斜給立案)과, 이에 딸린 문서 등[5점]이다. 무장현 관내 주민 강덕저(姜德著)와 강달저(姜達著) 형제는 모친상을 당하여 초상을 치르는 경비를 마련하고자 오정훈에게 비(婢) 자근예(者斤禮)와 그 소생 1명을 20냥에 팔았는데, 그때에 현감의 확인을 거쳐 입안을 발급받게 된 문서이다.

2) 1789년(정조 13) 8월에 오성로(吳星老)에게 발급한 사급입안과 관련 문서[5점]이다. 오성로는 동현 심원면에 거주하는 최성관으로부터 노비 5명을 32냥을 주고 사왔는데, 이에 대하여 현감의 확인을 거쳐 입안을 발급받게 된 문서이다.

2. 호구 단자[6건]

1) 1732년(영조 8) 탁곡면 신기리에 사는 유학(幼學) 이석삼(李碩三)[52세]에게 발급한 준호구(準戶口)로서, 아내 구씨[48세]와 아들[19세], 노비 3명을 소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 1876년(고종 13) 일동면 작약리에 거주하는 유학 황기윤(黃基閏)이 작성한 호구단자이다. 황기윤[63세]은 아내 이씨[61세]와 장남 황익선[23세], 차남 황해선[20세]과 한 가족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 1876년(고종 13) 상룡복면 송림리 거주 유학 박규진[45세]이 작성한 호구단자이다. 그는 아내 이씨[34세]와 아들 내외, 동서 부부와 함께 거주하며 노비 2명을 소유하고 있었다.

4) 1882년(고종 19) 심원면 검당리 거주 유학 김병상[45세]이 작성한 호구단자이다. 그는 홀아비로서 아들 내외와 함께 살며, 남자 종 1명이 있었다.

5) 1885년(고종 22) 오리동면 동백정리에 사는 유학 이학권[43세]이 작성한 호구단자이다. 그는 아내 김해김씨[41세]와 미혼인 아들[21세]과 살았다.

6) 연대 미상, 청해면 평지리 거주 유학 이지량[28세]이 작성한 호구단자이다. 그는 아내 전주이씨[32세]와 살며, 노비 1명을 소유하고 있었다.

3. 산송 관련 문서[2건]

1) 1872년(고종 9) 무장현 와공면 거주 김양복(金養復) 등이 수령에게 올린 등장(等狀)이다. 내용은 법성진리(法聖津吏)인 송녹범이 자신의 선산에 투장을 하였으니 파내어가도록 명하고, 양반 가문을 욕보인 점을 처벌해 달라는 것이다.

2) 1884년(고종 21) 무장현 동음치면 원동리 거주 이위용이 고창현감에게 올린 산송소지이다. 자신의 선영(先塋)이 동음치면 황산 북록에 위치하고 있는데, 그의 조부의 묘소와 근접한 곳에 누군가가 야밤에 투장을 하였으니, 누구의 소행인지 알 수 없으므로 이를 해결해 달라는 내용이다.

4. 기타[2건]

1) 1868년(고종 5) 고암서원(考巖書院)의 유관진(柳觀縝) 등이 무장향교에 보낸 통문이다. 그 내용은 이 지방의 사인(士人) 박규진(朴奎鎭)의 효행 사적을 예조에 알려 조정의 포상을 받도록 하자는 것이다.

2) 신해년(미상) 3월에 무장현의 유생 김기택(金期澤) 등이 예조판서에게 올린 문건이다. 그 내용은 김유신(金庾信)[595~673] 을 기리는 사당을 세우고, 아울러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김해김씨 3인인 김축, 김두남(金斗南), 김지남 등의 공신을 배향할 수 있도록 요청하고 있다.

3) 「무장포고문」

「무장포고문」은 고부 농민 봉기 이후 전봉준(全琫準), 김개남(金開男), 손화중(孫華仲)을 중심으로 한 농민 지도부가 무장에서 재봉기를 선언하면서 발표한 글이다. 글은 유학적 소양이 있었던 농민군 지도자 전봉준이나 문장이 탁월하고 전봉준과 친분이 있었던 옹택규(邕宅圭), 또는 전봉준의 비서 역할을 하였던 정백현이 썼다는 설이 있다.

[의의와 평가]

호구단자를 비롯한 고문서들은 조선 후기 향촌 사회의 생활상과 가족 제도 및 신분제도 등을 파악할 수 있게 하는 사료로서 일정한 가치를 갖는다고 볼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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