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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어학회사건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800473
한자 朝鮮語學會事件
영어음역 Joseoneo Hakhoe Sageon
영어의미역 Korean Academy Incident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전라북도 고창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신순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한글 말살 정책
발생(시작)연도/일시 1942년 10월연표보기
종결연도/일시 1943년 4월 1일연표보기
발생(시작)장소 전라북도 고창군
관련인물/단체 정인승|권승욱|신한철|한갑수|고창고등보통학교

[정의]

1942년~1943년 일제가 조선어학회 회원을 투옥한 사건.

[개설]

일본은 1939년 4월부터 학교의 국어 과목을 폐지하고 신문과 잡지를 점차 폐간하였다. 이에 조선의 한글학자 등 조선어학회 회원들은 일제의 탄압 정책을 직감하면서 사전 편찬을 서둘러 1942년 4월 원고 일부를 대동출판사에 넘겨 인쇄를 시작하였다. 함흥영생고등여학교(咸興永生高等女學校) 학생 박영옥(朴英玉)이 기차 안에서 친구들과 한국말로 대화하다가 조선인 경찰관인 야스다[조선 이름 안정묵]에게 발각되어 취조를 받게 된 사건이 벌어짐으로써 3·1운동 후 부활한 한글 운동의 폐지와 그들이 꾀하려 하였던 조선 민족 노예화에 방해가 되는 단체의 해산 및 조선 지식인들을 모두 검거할 수 있는 결정적인 기회를 잡게 되었다. 당시 고창고등보통학교는 이러한 정책에도 불구하고 한글 사랑을 뚜렷하게 실천하였고, 한글을 지켜 내는 데 중요한 일을 하였다.

[역사적 배경]

대외 침략 전쟁에 깊이 빠져들고 있던 1940년대에 일본은 식민지 통치를 더욱 강화하면서 민족 말살을 꾀하는 정책을 추진해 갔다. 정신적 세뇌 작업을 통하여 한국인의 정신을 일본인으로 만들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황국 신민화 정책을 추진하는 한편, 한국인의 이름과 성을 일본식으로 바꾸는 일본식 성명 강요[창씨개명]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한국인에게 일본어를 사용하게 하는 일본어 교육 정책을 폈다. 학교에서도 조선어 교육을 폐지하고 일본어로 강의하였고, 일본어를 기본 과목으로 가르치면서 학교에서도 일본어만을 사용하도록 강제하였다.

[목적]

정신적 측면에서 한국인을 일본에 동화시키는 정책을 추진해 나가는 가운데, 한국 지식인층의 저항을 탄압하여 한국인의 정신을 말살하려는 목적에서 시작되었다.

[발단]

일본의 침략이 본격화되는 1900년을 전후한 시기에 주시경(周時經)을 중심으로 한글 연구가 확대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는 민족의 혼을 지켜야 한다는 민족정신을 바탕으로 더욱 발전하면서 1921년 12월 조선어연구회가 창립되어 국어와 한글 연구를 꾸준히 해 나갔다. 1929년 10월에는 조선어사전편찬회가 조직되었고, 사전 편찬을 위한 연구로 한글맞춤법통일안·표준어사정·외래어표기 등 국어의 제반 규칙을 연구 정리하였다.

[경과]

일제는 1941년 민족정신이 강한 사람을 사상범으로 분류하고, 그들을 탄압하기 위하여 「조선사상범 예방 구금령(拘禁令)」을 공표하여 민족 운동이나 민족 계몽 운동을 하는 한국인을 마음대로 구속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함흥영생고등여학교 학생 박영옥이 기차 안에서 한국말을 하다가 조선인 경찰관 야스다에게 붙잡혀 조사를 받던 중 서울의 정태진(丁泰鎭)으로부터 민족정신을 지키도록 교육받았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정태진을 추적하였다. 그 결과 서울에서 조선어사전을 편찬하고 있음을 알아냈다.

1942년 4월 조선어사전은 대동출판사에서 인쇄를 하고 있었다. 나아가 정태진의 배후를 강력 조사하면서 그와 관련된 조선어학회가 민족 운동을 하는 단체라는 억지 자백을 받아 냈다. 그리하여 한글 교육 폐지와 조선의 지식인을 모두 검거해야 한다는 단서를 갖게 되었다.

[결과]

1942년 10월 1일부터 1943년 4월 1일까지 조선어학회 관련 학자 33명이 검거되었고, 그리고 증인으로 48명이 붙잡혀 갔다. 이들은 검거 및 취조 과정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다. 이극로(李克魯)·이윤재(李允宰)·최현배(崔鉉培)·이희승(李熙昇)·정인승(鄭寅承)·정태진·김양수(金良洙)·김도연(金度演)·이우식(李祐植)·이중화(李重華)·김법린(金法麟)·이인(李仁)·한징(韓澄)·정열모(鄭烈模)·장지영(張志暎)·장현식(張鉉植) 등 16명이 기소 처분되었고, 12명이 기소 유예되었다.

당시 일제의 악독한 경찰에 검거되어 옥고를 치른 사람 가운데 고창고등보통학교와 관련된 인사는 교사였던 정인승과 제12회 졸업생 권승욱이다. 고창고등보통학교와 한글은 깊은 인연으로 한글 사랑이 뚜렷하였고 깊이 공부하였다. 따라서 광복이 된 후 한글 교사는 고창고등보통학교 출신이라는 것 하나만으로도 자격이 충분하였다. 한글학회 사무실에서 함경도의 신태수, 권승욱, 고창고등보통학교 5회 졸업생 신한철과 10회 졸업생 한갑수 등이 정인승을 도왔다.

[의의와 평가]

조선어학회사건은 일제의 한글 말살 정책에도 굴하지 않고 굳건하게 한글을 연구, 계승시키기 위해 노력하다 한글학자들이 옥고를 치른 사건이다. 여기에는 정인승을 비롯한 고창고등보통학교 동문들의 희생과 노력이 뒤따랐다. 권승욱·신한철·한갑수 등은 스승 정인승을 도왔고, 이후 한글학회를 이끈 주역이 되었다. 곧 고창고등보통학교는 한글 교사의 발굴처이자 한글을 꾸준하게 가르친 민족 학교였던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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