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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800469
한자 獨立運動家
영어공식명칭 An independent activist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북도 고창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이병렬

[정의]

일제 강점기 전라북도 고창 출신이거나 고창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개설]

일제 강점기 전라북도 고창 지역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독립운동이 일어났으며, 고창 지역 출신으로 국내외 각지에서 독립운동을 주도한 인사도 적지 않았다.

[1910년대~1920년대 전반]

일제의 무단 통치기에 활동한 독립운동의 성격은 주로 무장 성격을 띤 적극적인 항일운동 세력과 3·1운동을 기점으로 만세 운동에 앞장선 독립운동으로 나눌 수 있다. 이 시기 고창 지역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는 유장렬(柳漳烈)이었다. 유장렬은 의병장 이석용 휘하의 부장(副將)으로 항일운동을 전개하다 1912년 항일 비밀 결사인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에 가입,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에게 국권 반환 요구서 및 일본군 철병 요구서를 제출하였다. 1914년에는 한훈(韓焄) 등과 같이 경상북도 풍기에서 광복단(光復團)을 조직하여 전라도에서 친일파 양재학(梁在學)·서도현(徐道賢) 등을 사살하고, 오성(烏城)에 있는 일본 헌병 분견소를 습격, 무기를 탈취하였다.

최전구(崔銓九)는 1911년 동지를 규합하여 광복단 조직에 참여했다가 1917년 12월 붙잡혀 영종도(永宗島)에 유배되었다. 이밖에 철원애국단에 소속되어 활동한 강대선(姜大宣), 독립의금부 참모관을 지낸 강영문(姜永文), 전라북도 독립운동감독부 고문을 맡은 신용수(愼鏞秀)가 있다. 1910년을 전후해서는 박도경(朴道京), 서종채(徐鍾採), 고석진(高石鎭) 등이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파리 장서 사건 혹은 유림 독립 선언이라 불리는 제1차 유림단 사건은 1919년 김창숙을 중심으로 한 유림의 인사들이 파리평화회의에 독립 탄원서[‘이하 파리 장서’]를 보내려고 했다가 발각된 사건이다. 3·1운동 이후 유림의 인사들은 유림이 독립 선언에 참여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며 이를 대신하여 장문의 한국 독립 청원서인 파리 장서에 서명하였다. 서명인 137명 중 호남 출신 선비 10명이 파리 장서에 적극 참여하였는데, 이 중 고석진(高石鎭), 고예진(高禮鎭), 고순진(高舜鎭), 고제만(高濟萬) 네 사람이 고창 출신이었다. 고석진 등은 파리 장서 사건에 앞서 1905년(고종 42) 말 일본의 강압으로 을사늑약이 체결돼 사실상 민족 주권을 강탈당했을 때 목숨을 걸고 스승인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을 모시고 의병 투쟁을 주도하다가 옥고를 치렀다.

고창 지역에서의 3·1운동은 무장 읍내에서 김영완(金永玩)이 시작하였다. 김영완은 마을 유지 이용욱(李用郁)과 김용표(金容杓), 김상수(金相洙), 이준구(李俊久), 김진호(金辰鎬), 박흥선(朴興先), 오태근(吳泰根), 박흥수(朴興洙) 등과 함께 만세 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하고, 준비를 서둘러 3월 15일 무장 장날을 이용하여 거사를 단행하였다. 김영환의 주동으로 수백 명의 군중이 행진을 하자 일제의 경찰 병력이 강제로 해산시켰다. 주동자인 김영완, 김용우, 김두남, 김영해 등은 현장에서 검거되었고 다른 주동자들은 뒷날 모두 검거되었다. 김영완은 서울 서대문감옥으로 이감되어 복역 중 혹독한 고문으로 11월 5일 옥사하였다.

3월 21일 일어난 만세 시위는 고창청년회가 주동하였다. 박동차가 서울에서 「독립선언서」·「국민휘보(國民彙報)」·「조선독립가」 등의 유인물을 입수하고 3월 18일 고창으로 내려왔다. 서울에서 가져온 자료는 김승옥이 고창면사무소의 등사판을 이용하여 등사하였다. 당시 고창경찰서 조선인 형사가 낌새를 알아차리고 등사물을 압수당해 실패하였으나 조선인 형사가 묵인하여 구금만은 면하였다. 그달 21일 시장을 지나 고창 읍내 거리에서 만세를 부르고 주동자인 은규선과 김승옥은 성안의 군청으로 들어가 군청 직원들을 강제로 데리고 나가려 했으나 경찰이 총으로 사격을 가해 강제로 해산을 당하였다. 이날 김명만이 먼저 잡히고, 김승옥오동균, 김창규, 곽기선, 김병일, 김응권, 박철근, 박영근, 홍종규, 신영택, 이성협, 김화종, 윤병훈 등이 체포되어 형을 받았다.

1919년 전국적으로 벌어진 3·1운동은 고창 지역에서도 적극적으로 일어났으나 고창군 북부의 흥덕과 성내에서는 1년 후인 1920년 3·1운동 1주년을 맞아 만세 운동이 계획되었다. 흥덕은 성내면 월산리에 사는 이종철을 중심으로, 당시 흥덕보통학교 학생인 이대성, 이종주, 유판술 등이 함께 주동하였다. 이종철이 정읍에서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와서 이종주에게 건네주었고, 이대성 등은 이종주 집에서 몰래 많은 양의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이후 이종주 등은 태극기를 크게 만들어 성내면사무소 운동장 소나무에 붙였다. 태극기 안에는 다음과 같은 경고문을 썼다. “경찰에 알리거나 버리는 자는 베어 죽인다.” 그리고 이종주 등은 선언서와 격려문을 살포하면서 13일 학교 운동장에 모이라는 인쇄물을 살포하였다. 이종주 등은 1920년 3일 13일 흥덕 장날 흥덕보통학교에 집결하여 만세 운동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그날 성내에서 먼저 하기로 하였으나 사전에 누설되어 들통이 났다. 이후 3월 28일 흥덕 장날로 거사를 연기하고, 집집마다 태극기를 돌렸다. 거사 당일 8시 이종주 등은 경찰에게 붙잡혀 성내를 시작으로 흥덕 읍내로 확산하려던 만세 운동은 불발되고 말았다.

1920년대 ]

1920년대 중반은 사회주의운동 또는 아나키즘[무정부주의]이 주목되는 시기였다. 1926년 일어난 6·10만세운동은 조선공산당과의 깊은 관련 속에서 추진되었다. 또한 해외에서의 독립운동을 위해 국내에서 꾸준히 군자금을 모금하는 등의 항일운동에도 매진하였다. 당시 독립운동가로는 고창 지역 청년회 활동에 앞장선 김승옥, 군자금 모집에 앞장 선 노진룡(魯鎭龍), 3·1운동에도 참여했으며 1928년 전북기자단 부회장으로 독립운동을 한 오동균, 조선농인사(朝鮮農人社)를 조직하여 활동한 오의균(吳毅均) 등이 주목할 만하다.

1919년 5월 25일 중국 상하이에 도착한 안창호(安昌浩)는 7월 10일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원령 제1호로 ‘임시연통제’를 공포하고, 국내에 연통부를 조직하였다. 연통부 전라북도 감독부는 대부분 고창 지역 인사들로 채워졌는데, 감독 노진룡을 중심으로 부감독 오의균(吳毅均), 재무원 이휴열(李烋烈)·황종관(黃鍾寬), 고문 강대식(姜大植)·이석렬(李錫烈)·나홍균(羅鴻均)·김종택(金鍾澤)·이강렬(李鋼烈)·신용수(愼鏞秀)·이철환(李哲煥)·홍종화(洪鍾和)·이우철(李愚哲)·이봉헌(李鳳憲)·김양평(金陽平)·백낙일(白樂一) 등이었다. 교통국(交通局)과 연통제의 비밀조직이 대한민국임시정부 활동에 미치는 영향은 절대적이었다.

1919년 고창고등보통학교[현 고창고등학교]가 설립되면서 고창 지역의 독립운동 양상은 고창고등보통학교를 중심으로 한 학생운동으로 바뀌었다.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인산일을 기해 고창고등보통학교의 강석영, 공립고창보통학교[현 고창초등학교]의 조관승·엄동섭·김소자가 만세 운동을 기획하였으나 발각되어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강석영 등은 모두 퇴학당했는데, 이 중 조관승은 경찰에서 너무 맞아 후유증으로 고생을 하였다.

1929년 12월 26일 고창고등보통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유금동(柳今童)은 율계의 석탄정에서 유일석, 윤정하, 윤욱하, 이재남, 윤순호, 조순옥, 진기용[진환], 서봉열, 박일우, 김기갑, 이자록, 오흥탁 등 16명과 회합을 열고는, 1930년 1월 23일 장날 정오 광주학생운동 동조 시위로서 학생들과 주민이 참가하는 시위를 열기로 결의하였다. 그러나 기밀이 누설되어 그달 28일 회합에 참석했던 유금동 등은 모두 체포되었고 준비했던 태극기와 격문도 몰수되었다. 유금동은 주모자로 잡혀 정읍경찰서를 거처 전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일본 형사의 고문에도 굴하지 않았던 유금동은 일본인이 주는 밥을 먹을 수 없다며 단식을 하다가 1930년 6월 2일 사망하였다. 당시 교장 신태수가 시신을 인수하여 학교장으로 장사를 지냈다. 유금동은 광복 전 고창고등보통학교 출신의 첫 희생자였다.

[1930년대 이후]

1930년대 이후 식민지 조선은 만주사변·중일전쟁·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의 엄중한 감시와 함께 전시 동원 체제 아래에 있었다. 이때 적색노동조합 및 농지개량조합을 조직하던 공산주의자들이 일제의 가장 중요한 경계 대상이 되었다. 이외에도 고창 출신으로 해외 독립운동과 국내 학생운동에 앞장선 이들과, 일제의 패망을 예고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한 이들도 일본 경찰의 감시 하에 있었다.

당시 고창 지역 출신 독립운동가로는 1920년대 후반과 1930년대 초반 전라북도 군산에서 노동운동을 하고 중국의 상하이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한 김성남(金聖男), 일본에서 학생 운동을 했던 강수원(姜壽元), 중경에서 광복군 제1지대 대원으로 활동한 박석권(朴錫權)이의신(李義臣), 연희전문학교 학생들로 구성된 조선학생동지회를 이끌었던 김상흠(金相欽), 구국결사단을 조직하고 김제군 내 일본 헌병대와 경찰서 습격 계획을 추진한 김영수(金永壽), 1935년 중앙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동맹휴학을 주도하고 비밀결사인 반제동맹(反帝同盟)을 결성한 황영구(黃榮九), 역시 비밀결사인 신인동맹(神人同盟)을 조직하고 동지 획득과 하부 조직 결성 및 자금 조성 등의 활동을 한 김재영(金在永)·정공일(鄭公一)·정휴규(鄭休圭)·정동원, “2차 세계대전에서 일제는 패망하고 왜놈들은 모두 죽여 마땅하다.”는 반일 시국담으로 민족의식을 고취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된 송한룡(宋漢龍)과 이판오, 고창고등보통학교에서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민족극을 준비하면서 독립운동을 참여하며 동지를 규합한 김방수, 일본 도쿄에서 조선의 독립을 목표로 항일의식을 고양하던 원용학(元容鶴) 등이 있다.

한편, 1929년경 고창고등보통학교에는 비밀결사 조직인 S[Socialism, 사회주의]당이 있었는데 무장면 출신의 김명환(金明桓)이 중심이 되어 만든 지하 조직이었다. 김명환은 고창고등보통학교 학생 배종인(裴宗仁), 정병규(丁炳圭)와 함께 비밀리에 회원을 모집하여 독서회를 조직하였다. 이듬해인 1930년 1월 21일 광주학생운동의 동정 궐기 시위 행사가 발각되어 2월 13일 관련자 11명이 검거되고, 정병규는 퇴학 처분을 당하였다. 1930년 2월에는고창고등보통학교 1학년생 김영덕·김선근·천성현·박동희 등 4명이 일본 사람이 경영하던 요리점 벽에 불온 문구를 쓴 것이 밝혀져 그달 22일 고창경찰서에 붙잡혀 들어갔다. 김영덕 등은 각각 15일간의 구류처분을 받았으나 26일 가출옥 형식으로 석방되었다. 같은 시기인 2월 21일에는 만세 사건을 선동한 혐의로 고창청년동맹위원장 우섬(宇閃)이 전주경찰서에 검거되고 그달 27일 정읍검사국으로 호송되었다.

1942년 10월 1일부터 1943년 4월 1일까지 조선어학회 관련 학자 33명이 검거되었고, 증인으로 48명이 붙잡혀 들어갔다. 당시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옥고를 치른 사람 가운데 고창고등보통학교와 관련된 인사는 교사였던 정인승과 제12회 졸업생 권승욱이었다. 고창고등보통학교는 정인승과의 깊은 인연으로 한글 사랑이 뚜렷하였고 깊이 있게 공부할 수 있는 곳이었다. 한글학회 사무실에서 고창고등보통학교 출신의 신태수, 권승욱, 신한철, 한갑수 등이 정인승을 도왔다. 이후 이들은 한글학회를 이끈 주역이 되었고, 곧 고창고등보통학교는 한글 교사의 발굴처이자 한글을 꾸준하게 가르친 민족 학교로서 이름을 날렸다.

[독립운동 유공자]

2020년 6월 30일 현재 고창 지역 출신이거나 고창 지역에서 의병활동과 독립운동에 참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표창을 받은 사람들은 다음과 같다.

강대선, 강대영(姜大榮), 강수원, 강영문, 강종회(姜鍾會), 고석진, 고순진, 고예진, 고용진, 고제남, 고제천(高濟川), 고치범(高致範), 김공삼(金公三), 김대옥(金大玉), 김동환(金東煥), 김만대(金萬大), 김방수, 김보배(金寶倍), 김상묵(金相黙), 김상오(金相五), 김상흠, 김성남, 김승옥(金升玉), 김여삼(金汝三), 김영수(金永壽), 김영수(金永洙), 김영완(金永玩), 김용인(金容寅), 김응구(金應九), 김재관(金在寬), 김재구(金在龜), 김재근(金在根), 김재영, 김재화(金在華), 김중구(金仲九), 김진호, 김창규(金昌奎), 노병희(魯炳憙), 노진룡, 박도경, 박명서(朴明西), 박석권, 박양운(朴良云), 박영관(朴永寬), 박정숙(朴正叔), 백인수(白麟洙), 서종채, 송성무(宋聖武), 송한룡, 신덕오(申德五), 신용수, 신종주(愼宗周), 신화산(愼華山), 안관숙(安冠叔), 안순경(安順京), 안화여(安化如), 안행팔(安幸八), 오동균, 오의균, 오장화(吳長化), 오장환(吳壯煥), 원용학, 유금동, 유장렬, 유판술(劉判述), 유희영(柳熙永), 이백겸(李白謙), 이석렬, 이성실(李成實), 이용욱, 이용태(李用泰), 이의신, 이종주(李鍾株), 이종택(李鍾澤), 이준구, 이철형(李哲衡), 이판오, 이화섭(李化燮), 전대원(金大元), 정공일(鄭公一), 정동원, 정시해(鄭時海), 정원채(鄭袁采), 정진옥(鄭陳玉), 정창묵(鄭昌黙), 정휴규, 최경현(崔敬賢), 최영만(崔永萬), 최유복(崔有福), 최익렬(崔翼烈), 최전구, 최중오(崔仲吾), 하천일(河千一), 홍익선(洪益先), 황영구, 황종관.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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