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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800015
한자 靈茂長農樂-軸高敞農樂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문화유산/무형 유산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전라북도 고창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명훈

[개설]

영무장(靈茂長) 농악의 ‘영무장’은 영광과 무장을 통칭하여 두 지역이 동일 문화권임을 드러내는 명칭이다. 영무장으로 통합되는 권역은 좁은 의미에서의 영광과 무장이지만, 좀 더 넓은 의미에서는 두 지역을 중심으로 인근의 장성, 함평 등지를 포괄하는 광역적인 명칭이다.

[동학 농민 혁명과 영무장 농악]

세습 무계 집단의 이념적 지향과 관련하여 동학 농민 혁명과 세습 무계 예인들이 구체적으로 관련되지는 않지만 이들의 지향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고 전승력과의 상관관계를 파악할 수 있다.

동학 농민 혁명은 1894년 ‘인내천’ 평등사상을 기초로 봉기가 이루어졌던 혁명적 사건이다. 동학은 평등사상을 기초로 이념과 조직을 제공함으로써 조선시대 농민 운동에 에너지를 부여했고, 운동의 진전 과정에서 그 사상을 구체화·체계화했다. 동학 농민 혁명의 과정에서 세습 무계 집단의 참여가 적극적이었다. 그 중에서 고창군 고수면 출신의 수접주였던 홍낙관의 사례는 동학 농민 혁명과 세습 무계 집단의 결합관계를 파악할 수 있다. 홍낙관은 본래 서울에 거주하던 양반 집안 출신이었는데, 정치적 이유로 고창에 피신하여 고창읍 서부를 관할하던 당골 무녀와 결혼하게 되었다. 무녀와 결혼하게 되면서 당골애비가 되었다.

첩정(牒呈)에 의하면 “홍낙관은 재인으로서 스스로 수접주라 칭했다. 창우와 무부의 무리가 모두 그의 당에 들어갔고 도한배(屠漢輩)들을 불러 모아 접을 이루었는데, 그 세력이 크게 된 후에는 양반 평민도 마구 몰아넣어 10만 대군을 이루었다. 모두 우두머리 가운데 으뜸을 칭했고, 매번 손화중의 선봉이 되었다”라고 한다. 홍낙관의 부대는 고창 지역, 특히 무장 지역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것으로서 인근의 세습 무계 집단이 집단적으로 결합했음을 보여 준다. 이것은 천민 신분으로서 동학을 신분 해방의 계기로 삼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간이 가장 맞다는 영무장 농악]

영무장 농악은 호남 우도 농악에 속하는 농악이지만 호남 우도 농악과는 다른 특징들이 있다. 영광, 무장, 장성 등지에서 활동한 명인들에 의해 영무장 농악이 형성되었기 때문에 명인들의 활동상에 의해 그 성격이 규정지어진다. 영무장 농악은 무속 일을 주업으로 하는 남자 당골들에 의해 전문패가 형성되었기 때문에 전문 예인 집단이라고 볼 수 있다. 가락이 화려하고 진법이 다양하며 춤과 잡색 놀이가 발달되었다.

영무장 농악은 예로부터 호남 우도 농악 중 ‘간이 가장 맞다는 영무장 농악’의 정통적 계보를 이어 오고 있다. 호남 우도의 아랫역[목포 지방] 농악은 좀 느리고 웃역[이리 농악]으로 올라갈수록 점점 빨라져 상당한 차이가 난다. 그 중간 지역인 영광, 무장[고창], 장성 지방은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아 ‘간이 가장 맞다’는 정평을 얻고 있어서 일컬어진 말이다. 영무장 권역의 특징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첫째, 고창군이 현재의 행정 구역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1914년 고창, 무장, 흥덕이 하나로 합쳐지면서부터이다. 그 전에는 세 지역이 모두 각각 하나의 독립된 행정 구역이었다. 그 중에서는 무장현이 현재 고창군 8개 면을 포함하는 가장 큰 현이었다.

고창군은 오늘날에도 생활권이라는 차원에서 본다면 전라남도 지방과의 관계가 매우 밀접한 편이다. 고려 시대에는 장사현무송현이 나주목 영광군에 속하는 8현 중에 2현이었으며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반영된 조선 초의 진관 체제하에서는 무장, 고창 및 흥덕이 모두 나주목에 속했다. 그 중 흥덕은 후에 전주부에 이속되었지만 1896년에 개편되면서 다시 전라남도 소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던 것이 1914년에 오늘날의 전라북도 고창군으로 확정되었다.

둘째, 영무장 지역의 세습 무계 예인들은 활동 공간을 공유하고 있었다. 역사상의 행정 구역과 인적 교류 관계에서 볼 때 ‘영무장’이라는 문화권은 충분한 개연성이 있다. 이와 더불어 실제 세습 무계 예인들의 사사(師事) 관계와 활동 지역을 살펴보면 영광과 고창, 장성 일대로 나타난다. 영광에서 태어났지만 고창에서 거주하면서 활동하기도 하고, 장성에 거주하면서 고창에 수시로 드나들며 활동하기도 한다. 또한 고창에 거주하면서 영광에서 많은 활동을 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거대 문화권 단위의 지역적 활동을 한 것이다.

셋째, 영무장 지역 세습 무계 예인들은 세습 무계의 연망을 기반으로 활동했지만, 마을 풍물굿과 적극적인 교류 속에서 성장했다. 영무장 지역 세습 무계 예인들의 활동은 남자 무당인 무부(巫夫)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들이 지역 단위 활동에서 주체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세습 무계의 연망을 통한 집단적 연행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또한 주된 향유층인 마을에서 이들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이고 후원해 주었기 때문이다.

[영무장 농악 전승의 원천인 세습 무계 예인들]

고창을 비롯한 영광과 장성 지역의 풍물굿 예인 중에는 세습 무계 예인들이 주를 이룬다. 이들은 일명 ‘재인’, ‘당골’ 등으로 불렸고, 사회적 천대 속에서도 지역의 풍물굿 예능을 주도하는 위치에 있었다. 때문에 마을 주민들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이러한 관계는 세습 무계 걸궁패의 지속과 마을 풍물굿의 예능적 발전이라는 상생의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영무장 농악의 명인들은 세습 무계 집안의 무부들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이들에서 기량을 전수받은 양인들도 있다. 영무장 농악의 명인들은 1890년대부터 해방 전후까지 활발하게 활동을 같이 했으며, 이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쇠 명인으로는 박귀바위[고창, 1860년], 최화집[장성, 1877년 추정], 김명준[영광, 1898년], 김홍술[고창, 1896년], 정호풍[고창, 1910년대], 표삼채[영광, 1912년], 전병남[영광, 1899년], 김성대[고창, 1885년], 강성옥[고창, 1886년], 신재근[고창, 1892년], 박성근[1903년], 성기만[함평, 1896년 추정], 신두옥[고창, 1915년], 신영찬[고창, 1914년], 김상구[고창, 1911년], 전경환[영광, 1920년], 황규언[고창, 1920년] 등이 있다.

장구 명인으로는 김학준[영광, 1889년], 김홍식[고창, 1880년], 김홍집[정읍, 고창, 장성, 1897년], 김성락[영광, 1910년], 김만식[고창, 1915년], 김동석[고창, 1920년], 황규언[고창, 1920년], 김오채[영광, 1926년], 정기환[고창, 1933년] 등이 있다.

김학준은 대금, 장고, 북 등의 기악과 육자배기, 단가 등에도 능했던 인물이다. 협률사 활동에 참여하여 외지 공연을 많이 다녔다. 특히 김학준의 장구 솜씨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화중선의 수행 고수로도 활동했는데, 이화중선이 그의 북 실력을 각별하게 평가했다고 한다. 이화중선의 소리에 반주를 한 음반이 남아 있다. 현재 파악되는 대부분의 장구 세습 무계 예인들은 김학준에게서 예능을 전수 받았다. 김오채는 “장구는 전라북도로 봐서는 [김홍집이] 지양님네[조상님]이고, 인자 전라남도에서는 김학준씨 그 양반이 지양님네”라고 평가했다.

김명준은 김학준과 형제간으로 함께 걸궁패 활동을 했다. 김명준의 경우 상모놀음이 뛰어나서 ‘상모로 말을 한다’라고 할 정도였다. 김성락은 김학준의 아들로 처음에는 장구를 치다가 상쇠를 했는데, 장구를 칠 때는 김만식의 뒤에서 쳤다. 김만식과 김성락은 장구 실력의 우위를 떠나 김만식이 8촌 매형이 되기 때문에 자연스레 앞에 섰다고 한다.

김학준 이후 세대에서 장구로 가장 유명한 사람은 김만식이다. 대외적으로 유명한 영광의 장구 예인 김오채의 직속 스승이다. 김만식과 김오채는 사제 관계이면서 같이 설장구를 치고 다녔는데, ‘같이 설장구를 치면 김오채보다 한 가락을 더 넣어서 친다’라고 할 정도로 뛰어났다고 한다. 위의 계보에는 없지만 김오채의 친 매형이 정읍의 설장구 예인 신기남이다. 세습 무계 예인들의 혈연관계는 사사 관계와 함께 영무장 농악 전승의 원천이 되었다.

[농악보존회를 통하여 현재로 이어지는 고창농악]

고창농악은 영무장 지역의 권역적 특징을 공유했던 전통이 행정 구역의 개편과 무형문화재 지정 과정에서 개별 지역 단위 풍물굿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영광 풍물굿은 마지막 세습 무계 예인이었던 전경환, 김오채가 1987년 무형문화재로 지정되면서 보존회를 결성했고, 고창 풍물굿은 세습 무계 예인들이 사라진 후 그들의 예능을 전수받은 사람들이 1985년 고창농악단을 결성하고 1998년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현재 영무장 농악은 영광의 영광농악보존회와 고창의 고창농악보존회가 이어가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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