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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800006
한자 -極樂往生-高敞邑城城踏-
영어의미역 Stepping on the Gochangeupseong Fortress is for the Love and an Easy Passage into Eternity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전라북도 고창군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송화섭

[개설]

바다에 인접한 연해 읍성으로 모양부리현의 전래 지명을 차용하여 모양성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고창읍성은 조선 단종 원년인 1453년 영광, 화순, 나주, 제주 등 전라도 7개 군현의 고을에서 노동력이 동원되어 축성된 읍성이다. 포곡식(包谷式) 산성과 평지성이 조합된 평산성으로 왜적 방어와 행정의 효율성을 제고하여 지어졌는데, 성곽의 둘레는 1,680m이며, 성벽의 높이는 4m, 면적은 189,764㎡이다. 성문으로는 공북문(拱北門)·등양문·진서문이 설치되었는데, 모두 문루와 옹성을 조성하였다. 치성도 6개소를 두고 왜적의 방어에 대응하여 견고하게 성곽을 쌓았다. 고창읍성은 축성 뒤에 한 번도 전쟁을 치르지 않아서 개수 역시 한 번도 한 적이 없는 조선시대 읍성의 전형을 보여 주는 곳이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4년에 한 번, 윤3월이 되면 여자들이 돌을 머리에 이고 성을 밟는 풍속이 전해 온다. 일명 답성놀이라고도 하는 성 밟기 풍속으로, 성을 한 바퀴 돌면 다릿병이 낫고 두 바퀴 돌면 무병장수하며 세 바퀴 돌면 저승길이 환히 트여 극락에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읍성에서 이런 풍속이 전해 올 수 있었는지, 먼저 고창읍성부터 차근차근 알아보기로 하자.

[고창읍성의 역사]

고창읍성은 자연 지형을 최대한 활용하여 축조한 성곽이다. 성곽의 축조 방식은 외벽은 성돌로 쌓아 올리고 내벽은 자갈과 흙으로 채워 다지는 편축법을 사용하였다. 외벽도 네모난 큰 돌을 자연석 그대로 사용했는데, 큰 돌을 아래쪽에 쌓고 위로 올라갈수록 성돌의 크기가 작아지는 전형적인 조선 중기의 성곽 축조 기술을 적용하였다.

고창읍성은 1453년 이전까지는 모양성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모양성은 백제 시대 모량부리현의 토성(土城)으로, 조선 단종 원년에 석성으로 증개축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모양성의 자연 지형이 산의 형상을 가진 포곡식 산세를 갖추고 있는데, 모양성의 산세가 다른 산맥과 연결되지 않고 평지 돌출형의 산악 지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모양성은 백제 시대 초기 형태의 토성으로 알려진 몽촌토성 및 익산토성[일명 오금산성]과 매우 흡사하다. 고창읍성의 외벽 아래에 평편한 산책길이 조성되어 있는데, 이 공간을 해자(垓字)라고 부르고 있다. 그런데 이 3m 정도의 산책길은 토성의 토축 제방의 한 형태로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산성에서는 해자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이러한 모양성의 성곽 구조를 살펴보면, 처음에는 포곡식 토성이었으나 조선시대 외벽을 석축하여 석성으로 전환시켜 토석 혼축식 성곽으로 만든 것으로 보인다. 고창읍성은 말 그대로 읍치의 중심이어서 민가도 동문 밖에 조성되어 있었다.

[성 쌓기 설화가 말해 주는 것들]

고창 지역에서는 다음과 같은 「모양성과 서산고성의 성 쌓기 설화」가 전해 오고 있다.

“옛날 백제 때 남자와 여자가 두 패로 나뉘어 성 쌓기 내기를 하였다. 평지와 산으로 된 모양성은 여자들이 쌓고 아산면 소재인 성틀봉의 서산고성은 남자들이 쌓기로 하였다. 남자들은 자신들의 힘이 세니까 여자들이 자기들을 이길 수 없을 거라고 여유를 부리며 날마다 여흥을 즐기느라 성 쌓는 것을 게을리 하였고, 반면 힘이 약한 여인들은 꾀를 내어 성틀봉이 마주 보이는 북쪽 문은 쌓지 않고 똑같이 마주 보이는 북쪽에서 장구를 치며 노는 것처럼 꾸미고 상대 쪽에서 보이지 않는 곳은 부지런히 쌓아 갔다.

북쪽을 빼놓고 성을 거의 완성해 가던 어느 날, 상대편 남자 쪽에서 한 남자가 한밤중에 여자 친구를 만나러 왔다가 성이 완성되어 가는 것을 보고 부리나케 되돌아가 자기편 사람들에게 여자 쪽 성이 북쪽만 남겨 두고 거의 완성되었음을 알렸다. 그제야 남자들이 정신을 차리고 성을 쌓을 돌들을 부랴부랴 실어 나르고 있는데, 여자 쪽에서 성을 완성했다면서 만세를 불렀다. 이에 남자들은 한탄을 하며 성 쌓기를 중단하였다. 그 때 남자들이 버리고 간 돌 들이 쌓여서 고인돌 무더기가 생겼다.”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77호로 지정된 서산고성고창군 아산면 하갑리 산1번지에 속한다. 서산고성은 백제 시대 테머리식 산성으로, 성벽은 남쪽 266m, 동쪽 142m, 북쪽 322m 정도로, 전체 둘레는 730m에 이르며, 높이는 약 3m 내외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약간의 성벽만 남은 채 거의 모든 성곽이 붕괴되어 있다.

서산고성이 위치하는 산을 성틀봉이라고 부르는데, 지금도 멀리에서 바라보면 테머리식 성터가 보인다. 전설이 말해 주듯이 성틀봉 아래에는 고인돌이 산재해 있다. 성 쌓기 경쟁에서 진 남자들이 발로 차 버린 성돌 치고는 크기가 무척 크다.

고인돌은 선사 시대 무덤돌이기에 백제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성 쌓기의 성돌도 아니며, 조선 시대에 쌓은 고창읍성과도 거리가 멀다. 고창읍성의 성 쌓기 전설은 남성과 여성이 편을 나누어 겨루는 방식이 기본인데, 이러한 설화는 고창읍성을 축성한 이후에 「오누이 힘내기 설화」가 차용된 것으로 보인다. 「오누이 힘내기 설화」는 힘이 장사인 오빠와 여동생이 힘을 겨루는 내용으로, 여동생은 성돌을 치마폭에 실어 날라 성 쌓기를 하고 오빠는 나막신을 신고 한양을 다녀오는 내기를 하는 내용이다.

「모양성과 서산고성의 성 쌓기 설화」에서는 「오누이 힘내기 설화」의 비극적인 요소를 제거하고 여성 편을 승자로 결말짓고 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성곽을 쌓는 데 대규모의 노동력이 동원되었음을 강조하고 있으며, 이는 모양성을 쌓는 데 고을 주민들이 합심 협력하여 참여하였음을 강조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불교 신앙에서 비롯된 답성 민속]

고창 모양성의 답성 민속(踏城民俗)은 여자들이 성돌을 머리에 이고 성을 발로 밟으면서 도는 의식이다. 성밟기는 달리 ‘성돌이’라고도 부르는데, 불교 의식의 탑돌이에서 비롯되었다. 답성민속은 4년에 한 번 윤3월에 모양성을 찾아가 성을 밟으면서 극락왕생을 서원하는 의식으로, 극락왕생을 염원하는 탑돌이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불교 신앙의 탑돌이와 정월 세시 풍속의 다리밟기가 조합이 되어 모양성 성 밟기가 태동한 것으로 보이는데, 부녀자들이 돌을 머리에 이고 성 밟기를 하는 주체로 등장한 것은 「오누이 힘내기 설화」에서 모티프를 차용한 것이다. 고창 모양성의 답성민속이 태동하던 조선 후기에 「오누이 힘내기 설화」로 인해 부녀자들이 돌을 들고 성 밟기에 나서게 된 동기를 부여한 것으로 보인다.

탑돌이는 부처의 공덕을 찬양하면서 서원하는 마음으로 탑을 도는 불교 의식이며, 다리밟기는 정월 대보름에 달맞이를 하면서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풍속이었다. 그런데 1678년(숙종 4) 윤삼월에 고창현감 이항이 모양성 개축을 주도하면서 성곽의 축조를 기원하고 고을을 보호하는 방편으로서 불교의 탑돌이와 다리밟기를 차용하여 주민들에게 성돌이를 권장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고창 모양성 밟기는 극락왕생 서원과 함께 4년에 한 번씩 성을 밟게 하여 고을 수호와 애향심을 갖게 하는 의미도 숨어 있다. 모양성이 한 번도 무너지지 않고 오늘날까지 원형으로 보존될 수 있었던 것도 성을 밟는 풍속이 지속적으로 전승해 왔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모양성 답성민속은 부녀자들이 돌을 머리에 이고 성을 돌면 극락왕생한다는 신앙심을 유발시켜 왜구 방어의 호국 의식을 강화하고 고을 수호를 동시에 성취할 수 행사로서, 관청에서도 적극 권장하였을 것이다. 모양성의 답성 민속은 축성 전설에서 말해 주듯이 부녀자들의 중추적으로 참여하였으나, 7월 백중놀이 때에는 농부들이 장원례를 하면서 성을 한 바퀴 도는 의식을 거행하는 관행이 있었다고 한다. 백중날 장원례는 농사를 잘 지은 머슴을 장원으로 뽑아 어사화를 머리에 씌우고 모양성의 성돌이를 즐기는 놀이였다.

[살아서 다녀올 수 있는 극락세계-모양성]

고창 모양성은 살아서 저승을 다녀올 수 있는 곳이다. 음력으로 4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윤달 초엿세날, 또는 열엿세날, 스무엿세날에 모양성 인근의 부녀자들이 앞다퉈 모양성 성밟기에 나선다. 바로 그날, 극락의 저승문이 열린다고 하니, 살아생전에 죽은 후에 살 곳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아닌가. 그런데 묘하게도 모양성의 성밟기는 공북문으로 들어가 성을 돌아서 다시 공북문로 돌아 나오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북문으로 들어간다는 자체가 저승으로 향한다는 뜻이니, 북망산천 체험 장소로는 최적이 아닐 수 없다. 윤달이 든 해는 손이 없는 달로서 수의를 만들기도 바쁘지만, 언제 또 4년을 기다리겠는가. 그러니 한복 곱게 차려입고 생전의 극락왕생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이러니 고창의 모양성은 윤년 3월만 되면 극락의 정토 세계로 꾸며진다. 1678년 윤삼월에 고창읍성을 개축하고, 1803년(순조 3) 윤2월에 진서화표를 조성한 뒤로 고창 사람들은 윤년 3월만 되면 극락왕생 체험을 해 왔다. 모양성을 극락세계로 구현해 놓고 극락왕생을 서원하며 살아왔다.

살아서 극락세계를 다녀온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그래서 고창 지역 사람들은 한 번 돌면 소원 성취하고, 두 번 돌면 무병장수하고, 세 번 돌면 극락왕생한다는 속신에 따라 아침부터 모양성의 동편 가파른 성곽을 오르기 시작한다. 처음으로 당도한 동문의 등양루에 올라 누각의 문을 세 번 열어젖히면서 소원 성취와 무병장수와 극락왕생을 주문한다. 그 문이 극락의 문이다. 문을 열고 극락세계로 들어선 것이다. 말로만 듣던 극락정토에 들어서니 마음이 편안해진다. 모양성의 남쪽 정상에 오르면 하늘이 무척 아름답다. 극락세계가 하늘나라인데, 이토록 아름다우니 마음이 편안해진다. 마치 도솔천 내원궁에 오른 듯하다. 고창 모양성이 잠시 미륵보살이 좌정하고 있는 도솔천 내원궁처럼 느껴진다.

불자들은 극락왕생을 서원하고자 지장전에 찾아가 빌고 또 비는데, 4년에 한 번 모양성 밟기를 하면서 생전에 극락을 다녀왔으니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에 있던가. 다시 성을 돌아 내려오는 길에 서문의 진서루(鎭西樓)에 들른다. “고창읍이 오래 오래 살기 좋은 고을이 되게 하소서.” 하고 기원하면서 길을 재촉하여 다시 공북문에 다다른다. 공북문을 나서면서 북망산천을 두루 두루 둘러보는 사이 죽음의 두려움은 온데 간데 없고 편안한 마음을 갖고 집으로 향한다. 살아서 극락세계에 다녀왔으니 어찌 마음이 편안하고 즐겁지 않으랴.

극락왕생을 서원하는 여인들이여! 윤달 든 해에 고창으로 가자. 죽어서 가고 싶은 극락세계를 살아서 구경해 볼 수 있다 하니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는가. 한번 기회를 놓치면 4년을 기다려야 한다. 4년에 한 번씩 치러지는 월드컵 축구대회를 기다리듯, 윤달 든 해를 손꼽아 기다리며 고창 모양성으로 극락 체험을 다녀오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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